피할수록 오히려 피할 수 없네요

회피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을 직면하는 것

by 기역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도착한 곳, 그곳에 있는 건 역시 전장뿐이다.
돌아가. 여긴 나의 전장이다.
넌 너의 전장으로 가라.
미우라 켄타로 '베르세르크' 중


즐길 수 없다면 피하자. 감당할 수 없으면 피하자고 생각했었다.

순간적 행복을 연장하려고 미루거나 피했던 일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어떤 일을 회피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을 직면하는 것이었다.


내가 피해왔던 일들 중 하나는 '정리'였다.

어느 순간부터 물건에 짓눌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산 물건들이 방에 가득 찼는데, 내가 쓸 공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산 건 나지만 이제 물건들이 날 소유하고 있는 느낌이었고

뭐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쓰지도 못했다.

'버림'에 대한 고민과 고통을 회피해서 생긴 일이었다.

버려할 때를 놓친 물건들이 굉장히 많았고 어느 순간 처치곤란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쓰거나 입을 거라 생각하고 쟁여준 물건들과 옷들...

시간이 지나 쓸모를 다하지 못하고 짐과 옷무덤이 되고 있었던 거다.


뭔가를 사고 갖는 것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오래 껴안고 있으니 물건도 나도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뭔가를 덜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좋아하는 스타들의 사진을 소장하는 취미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어온 취미지만 이제는 집착하지 않는다.

뭔가를 갖는 것보다 사용할 공간이 넓은 게 더 낫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grim_giyeok



정리뿐만 아니라 '피하는 습관'이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생각해 봤다.

경험에 의해서 피했던 일들도 많았지만 경험 못한 미지의 것에 대한 저항이 항상 컸었다.

그래서 항상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까지 2개월에서 길게는 2년까지 걸렸다.


결론은 피할수록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막상 부딪쳐보면 할 수 있는 일들도 있었고 아닌 일들도 있었지만,

해보지 않은 채 생각으로만 그쳤던 일들이 많아지는 게 결국 내게 좋지 않구나 깨달았다.

피하고 방어하는 태도로 삶에서 획득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느꼈다.

확실한 건 안전. 그러나 그게 행복으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안전지향적인 태도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험을 제거하려는 태도는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방어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 타인의 방어적 태도는 공격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여태까지 위험요소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다면, 이제 깰 때도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전한 곳에도 나름의 고통은 있다. 피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피하고 싶은 일들을 내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반기지 않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일들은 기어이 나를 방문한다.

오히려 피할수록 들러붙을 때도 있다.

결국은 내가 직면해야 할 일은 피할수록 못 피하게 된다.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것을 인지하고 조금 편해졌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내 마음에 도움이 됐다.


*아모르파티(Amor Fati)로 가는 다섯 번째 마음가짐

회피하면 또 다른 고통을 직면해야 한다. 회피하지 말자.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D


글쓴이/그린이: 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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