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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명한 Apr 01. 2021

프로파일러 입직기 (完) 과학수사과 범죄분석관

조마조마했던 초심을 버리고 단단해진 굳은살로 중심을 잡아 나가면 된다.

"고등학생 때부터 장래희망이던 범죄분석 업무를 하게 되어 기쁩니다."라는 말로 사무실 첫인사를 했다.


지구대 근무를 마치고, 지방청(지금은 시도경찰청으로 명칭이 변경) 과학수사과로 전입되었다. 과학수사과는 과학수사대와 과학수사관리계로 나뉜다. 과학수사대는 사건이 발생하면 현장에 나가 감식을 하는 업무를 하고, 현장감식요원과 검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수사관리계는 과학수사과의 장비·예산·교육 등 서무 업무와 거짓말탐지·몽타주·법최면·범죄분석 요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기들 중 일부는 해당 지방청의 사정에 따라 과학수사과에 배치되었으나 현장감식 업무를 맡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바로 범죄분석 업무를 시작했다.


어려서 마음에 담았고, 커가며 머리에 담았고, 이제는 몸담고 있는 직업, 프로파일러.


흔히들 '프로파일러' 하면 가장 먼저 살인 사건 현장에서 피의자의 성격을 추리해내는 천재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현재 프로파일러가 하는 업무는 범죄자 프로파일링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심리학적 이론과 연구를 기반으로 범죄 수사를 다양하게 지원한다. 진술분석, 심리부검, 지리적 프로파일링 등 심리에 관련된 분야에 대한 의뢰가 다양하다.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의 심리와 관련된 질문을 받을 때도 있다.


범죄분석 의뢰가 들어오는 사건은 하다 하다 답이 없어서 오는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더 꼼꼼하고 예리한 시선을 가져야 했다. 일반적인 상식도 필요할 때가 많았다. 예를 들면 계좌의 일일 출금 한도라던가, 특정 직업의 특성이라던가, 해당 지역의 교통편이라던가 하는 것들도 사건 파악에 도움이 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을 설득할 만큼의 논리력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구치소로 구속 피의자 면담을 간 날이 떠오른다. 입직 전 소년범들을 면담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성인 중범죄자를 면담하는 것은 처음이라 내심 긴장이 됐다. 물론 막상 면담을 해보면 그렇게 어려울 것은 없다(이와 관련해서는 ‘범죄자와 마주 앉기​’ 글에 상세히 적은 바 있다).


면담을 다녀온 후 보고서를 작성하며 내가 어디까지 인간을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는지도 많이 고민했다. 이 문장은 너무 당연한 게 아닐까? 이 문장은 너무 무리한 주장이 아닐까? 등 문장 하나하나가 어깨를 누르는 듯했다. 게다가 이 사건에서 어떤 점이 중요한지, 어떤 흐름으로 보고서가 구성되어야 하는지 하는 기술적인 고민까지 더해지자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보고서를 많이 쓰고, 선배들의 보고서를 더 많이 읽으면서 서서히 감을 잡아나갔다.


존경스러운 선배와 일하게 된 덕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선배는 훌륭한 분석능력과 차분한 성정 등으로 인정받는 프로파일러였다. 선배는 십 년 넘게 경력을 쌓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동료로 인정해주고 내 의견을 자신의 것과 동등하게 받아들여주었다. 매우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꽤 큰 부담감으로 다가오기도 해서, 선배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지난 몇 년 간 다양한 사건들을 분석했다. 사건은 그 죄종에 따라, 발생시간에 따라, 피해자-가해자 관계에 따라, 가해자 성격에 따라, 범행 동기에 따라 제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매 사건마다 쟁점을 찾고 더 깊이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각종 범죄통계와 범죄학 연구들을 접하며 사회적 맥락에 개별 사건을 위치시켜 해석하려는 시도도 꾸준히 해왔다.

‘전문가’라는 소리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학력으로도, 경력으로도 인정받고 싶지만 실력으로 가장 인정받고 싶었다. 수사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분석을 하고 싶었다. 점점 수사팀의 인정을 받아가고 있는 듯싶다.


몇 년이 빠르게도 흘렀다. 초심으로 유난을 떤 적은 없었기에 덤덤하게 시간을 보내왔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처음만이 가질 수 있는 예민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꿈을 살아내며 때로는 시큰둥하다. 경험이 굳은살처럼 쌓여 점차 감각이 무뎌지는 건 아닐까 아쉽다. 심드렁한 얼굴로 사건 기록들을 펼쳐놓고 탁탁탁 키보드를 내리친다. "이번 달 까지는 보고서 마무리해서 실적으로 올려야 하는데" 하는 직장인의 마음부터 "꼭 잡고 싶다"는 작은 소명까지 모두 평범한 하루가 되었다.


뭐, 언제까지고 처음 같을 수는 없지. 조마조마했던 초심을 버리고 단단해진 굳은살로 중심을 잡아 나가면 된다. 더 꾸준히, 더 담대하게.



긴긴 시간이 지나 드디어 프로파일러로 일하게 되었다. 석사 과정, 취업 준비, 입사 시험... 이 일들은 꽤나 고되어서 ‘이것만 마치면 내 삶을 되찾을 거야’라고 되뇌곤 했지만 돌이켜보니 그 고비야말로 내 삶이었다. 다음 장래희망은 무엇으로 할까. 학위나 마치고 생각해라.


이렇게 저는 꿈을 이루었답니다. 과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앞으로의 글도  부탁드립니다: 인터뷰이 되어보기, 법심리학 박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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