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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던 세계 1

오랜 시간 연애를 한다는 것은

by 박바코

나는 동물을 귀여워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동물의 권위를 높이는 일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에게 동물은 낯설고 특이한 존재였다.
싫어한다기보다는 그런 판단조차 해본 적 없을 정도로 생경했다.
우리 엄마 아빠는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는 분들이었고 자연스레 나 역시 접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초등학교 일학년, 아니 이학년 즈음 겪었던 일화로 인해
‘동물=낯설고 특이하며 게다가 무서운 존재’라는 생각이 단단히 뿌리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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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는 날에는 신기한 물건들을 팔러 온 사람들이 운동장 한편을 차지했다.
친구들과 쪼르르 달려가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다니며 구경을 하던 중,
너무나 작고 보드라운 생명체들이 박스에 들어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햄스터였다.
제대로 햄스터를 본 게 처음이던 나는 박스 앞에 쪼그려 앉아 자그마한 생명체들이 꿈질거리는 것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이내 주인분이 손바닥 위에 햄스터를 올려주셨다. 회색빛이 도는 털을 가진 아기 햄스터였다.
부드럽고 작은 생명체가 귀여워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려는 찰나,
연한 분홍빛이 섞인 살색의 다리가 쫙-하고 벌어지더니 내 손바닥에 붙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나는 미지의 동물에 공격이라도 당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햄스터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자연스러운 행동을 했을 뿐이다.
게다가 햄스터 입장에서 자기보다 몇십 배는 커다란 내가 더 무서웠으면 무서웠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기치 못한 비주얼과 촉감은 당황스러움을 넘어 약간의 공포까지 느끼게 했다.
후다닥 다시 박스에 햄스터를 내려놓았지만, 그 후 나는 어떤 동물도 쉽게 쓰다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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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아이들은 정말 좋아했다. 네 살 터울 남동생의 갓난아기 시절에는,
엄마가 안아 주고 있을 때조차 넘치는 사랑을 감추지 못해 발바닥에 뽀뽀를 하고는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미술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었는데, 힘들기는 했지만 그 순수함에 감동받을 때가 더 많았다.
이렇게 동물들 대신 아이들에게 사랑을 몰빵한 나에 비해, 애인은 정확히 반대되는 사람이었다.
길고양이 한 마리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남의 집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고,
산책하는 강아지라도 만나면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겐 큰 관심이 없었다.
내가 전 국민의 랜선 조카 사랑이와 삼둥이에게 빠져, 이모 노릇을 자처해 동영상을 공유해도
응답기 수준의 ‘귀엽네’를 하나 보낼 뿐 이내 다른 이야기를 하는 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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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동물들을 보게 될 때는 얼른 애인에게 알려주었다.
톡 하면 귀엽다는 말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그 즐거운 표정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 귀여움에 공감은 못했지만, 행복한 마음은 함께 느낄 수 있었고 그걸로 충분했다.
길을 걷다 만난 고양이의 사진을 찍어 보내고, sns에서 귀여운 영상을 보면 바로 공유했다.
의식하지 않았을 때는 그냥 지나치고 몰랐을 동물의 다양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들어오니 빤히 보게 되고, 보다 보니 귀여운 면을 알 거 같기도 했다.
애인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을 보게 되면 나를 톡톡 치며 ‘저기 좀 봐봐.’ ‘앞에 아기 보여?’라고 말했다.
지나가는 아기란 아기는 다 알려주는 통에, 리액션이 고갈된 날도 있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고, 애인이 아이에 관한 얘기를 할 때 표정이 달라졌단 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아이가 좋냐고 물었다. 그는 끄덕이며 말했다. 나를 따라보다 보니 이제는 좋아졌다고.
그 말에 나도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나도 동물이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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