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by 류재민

신경숙 작가가 십 년도 전에 쓴 소설이 있다. 나는 그 소설을 읽으려고 그 책이 꽂혀 있는 북카페에 자주 갔었다. 점심시간에 아주 잠깐.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몇 장을 넘겨보다가 읽은 곳까지 몰래 접어놓고 오곤 했다. 다음에 가서 접어놓은 데부터 이어보고, 나올 땐 지난번처럼 윗단이나 아랫단을 살짝 접어놓고.

그렇게 반년쯤 지났을까. 그날은 정기휴일이 아닌데 문이 닫혀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어디가 아픈가. 문 안쪽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고 두리번거리는데, 별안간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동시에 주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내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가게를 내놓아서 정리 중이에요. 그래도 오셨으니, 커피는 그냥 드릴게요.” 그리곤 내가 야금야금 읽고 꽂아두기를 반복했던 그 책을 책장에서 빼줬다.


주인은 말했다. “단골이었는데, 이제 가져다 편히 보세요”라고. 나머지 책들은 바자회를 열어 한 권에 천 원씩 팔겠다고 했다. 커피와 책을 선물 받은 나는 어쩔 줄 몰라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만 했다. 그녀는 “주인이 바뀌더라도 자주 찾아주세요”라고 했다.


그때 나는 그 주인에게 어떻게든 답례해야 했다. 하다못해 길 건너편 제과점에 가서 단팥빵이든, 소보루빵이든, 조각 케이크이든 간에 한 봉지 사다 줬어야 했다. 그래야 책을 함부로 접은 지난날의 면죄부와 귀한 책을 받은 것에 대가를 한꺼번에 치렀으리라. 그래야 더 이상 종이를 접지 않고 맘껏, 편히 봤으리라. 바보같이 그걸 못했다.


그날 밤, 나는 소설 속에 나오는 ‘윤 교수’가 강의 시간 학생들에게 들려준 크리스토프 이야기를 떠올렸다. “우리 모두는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여행자일세. 그러나 물살이 거세기 때문에 그냥 건너갈 수는 없어. 우리는 무엇엔가에 의지해서 이 강물을 건너야 해. 그 무엇이 바로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이기도 할 테지.” **


카페를 다시 찾았을 때, 새 주인은 책장을 치웠다. 책장이 있던 자리에는 이름 모를 화가의 그림이 걸렸다. 커피를 마시며 더 이상 책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일까. 매주 향했던 발길은 주인이 바뀐 뒤부터 부쩍 뜸해졌다. 어쩌면 전 주인이 “주인이 바뀌더라도 찾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발길은 아예 멈췄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록 인사치레로 한 말이라도, 난 한동안 그곳을 찾아갔다.

창밖 날씨는 후텁지근했지만, 실내 공기는 청량했다. 잔잔히 흐르는 재즈 선율이 커피의 진한 맛을 더 했다. 혼자 차지하고 앉은 둥근 탁자 위, 작은 화분 하나가 서먹함을 밀어냈다. 밖을 내다보니 야외 테이블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일곱 개의 파라솔은 가지런히 접혀 있었다.


야외 테이블을 가로질러 내가 걸어 들어온 거리가 보였다. 경복궁 방향으로 가는 차와 반대편인 금융연수원 쪽으로 가는 차들이 자주 교행했다. 인도에는 사람들이 빠르게, 또는 천천히 걸으며 자신들의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경복궁 방향으로 마을버스 한 대가 내려갔다. 아침에 타고 온 초록색 종로 11번 버스. 집이 있는 충남 천안과 서울 삼청동을 오가며 이용하는 내 출퇴근 교통수단 중 하나다. 열 명이 앉으면 자리가 꽉 찰 정도로 일반 버스보다 규모가 작았다.


좌석이 없을 땐 손잡이를 잡고 서서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키는 185센티미터인데, 버스 천장은 그보다 10여 센티미터쯤 낮았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버스 중간쯤 달린 공기통을 열어놓는데, 이따금 허리를 바짝 세우고 거기에 고개를 쓱, 내밀곤 했다.

그런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더러 의자에 앉아가는 어린 학생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마시던 커피를 쏟을 뻔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커피숍을 나왔다. 춘추관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고, 마음은 오래전 가을걷이를 끝낸 들녘만큼 황량했다. 커피 한잔으로 허전함과 무기력을 달래긴 어려웠나 보다. 아버지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문학동네, 2010) 인용

**같은 책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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