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핑 대신 펜을 드는 순간의 여유
추석날 엄마와 언니, 나 이렇게 세 모녀가 마주 앉아, 엄마가 준비한 종이꾸러미들을 보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편지들이다. 엄마에게 썼던 편지는 하나하나 코팅까지 되어있다. 젊은 날의 치기 어린 나는 야심이 가득해, 성공해서 효도하겠단 말이 가득하다. 그 편지를 다시 읽고 있는 지금의 내가 낯부끄러울 정도로.. 나는 한의사도 정치가도 과학자(그래, 우리 때는 장래희망으로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이 꽤 많았지)도 되지 못했다. 아쉽게도 매달 용돈을 챙겨주는 효녀도 아니다. 하지만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때와 변함없다. 편지를 읽으면서 낯간지럽기도 했지만 행복하기도 했다. 엄마가 보관한 우리들의 편지들로 오랜만에 빛바랜 여러 기억들이 살아났으니까.
그 시절엔 편지를 쓰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어버이날엔 부모님께, 스승의 날엔 선생님께, 친구의 생일에는 꼭 선물과 함께 편지를 써줬다. 게다가 일면식도 없는 군인에게 위문편지를 쓰거나, 바다 건너 외국 친구와 펜팔을 하기도 했다. 너무나 당연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구나 이런 감성적인 행위를 했다는 것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떠올려본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연필의 미세한 진동, 종이 위로 흐르는 잉크의 냄새. 문장을 짓기 위해 고민하는 순간들, 오글거리는 표현을 지우고, 다시 쓰고, 마침내 마음을 담아 보내던 그 순간을.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편지지 대신 손가락으로 빠르게 타이핑을 하고, 스크린 속에서 마음을 주고받는다. 즉각적인 답을 기대하고, 긴 글보다 짧은 메시지로 감정을 표현한다. 가끔은 이 편리함 속에서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손 편지는 느렸다. 편지가 도착하기까지의 기다림은 조급함을 가득 담았지만, 그 안에는 일종의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천천히 읽고,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속에 새기고, 답장을 준비하는 시간. 그것은 다른 속도의 세계였다. 그 느림 속에서 우린 서로를 생각하며 시간을 쓴 것이다.
다시 손편지를 써보려고 하면 편지지 앞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오래도록 편지를 써 보질 않았으니, 뭘 써야할 지 모르겠는 것이다. 정말로 몇 줄 적다 보면 할 이야기가 없어진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적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편지에 써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버린다. 그런데 소소하다 못해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써도 되는 게 편지다. 손편지를 워낙 안 쓰다 보니 이제는 너무 어렵게, 숭고하게까지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과거의 서간문들을 보면, 정말 별 이야기를 다 한다. 최근에 읽었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도 화자가 그의 가족에게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몇 장이고 써 내려간다. 자신이 얼마 전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라면서 말이다. 편지를 받는 이와 전혀 상관없는 사사로운 이야기라도 모두가 호사가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니까 그때의 편지는 지금의 SNS이자 메신저였던 것이다.
두 달 뒤면 엄마의 생일이 다가온다. 오랜만에 또다시 한번, 펜을 들어 엄마에게 마음을 전해봐야겠다. 며칠이고 천천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