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을 등산한 3가지 이유
저녁이 되자 퇴근을 마치고 친구가 호텔로 왔다. 친구가 오자마자 우리는 함께 동문야시장에 갔다. 전복버터밥, 전복김밥, 회와 딱새우를 샀는데, 그중 전복김밥은 내일을 위한 것이었다. 친구가 제주도에 온 이유는 한라산 등산을 위해서였다. 친구는 내가 제주도 여행을 간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라산을 가자는 제안을 했다.
사실 나는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차피 올라갈 걸 왜 내려오나 싶고, 이상하게 어릴 적에 부모님이 오빠보다는 나를 데리고 등산을 다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해 들어 등산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그래서 힘들지 않은 산 위주로 등산을 했었는데, 한라산은 이야기가 달랐다. 신혼여행으로 한라산을 다녀온 언니에게 듣기론 9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걱정은 되었지만, 다녀온 지인들이 운동을 평상시 한 나라면 갈 수 있을 거란 이야기에 친구의 제안을 수락했다. 결정적으로 한라산에 가기로 한 이유는 쉼을 위한 여행도 좋지만, 길다면 긴 2주간의 여행 중 뭔가 해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라산을 올라가는 3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1번째 산에 올라가서 먹는 김밥과 라면이 꿀맛이기 때문에
2번째 3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백록담을 보기 위해서
3번째 한라산 등정 인증서를 받기 위해서였다.
새벽 5시 기상 알람이 울리자, 친구와 나는 물을 끓여 보온병에 담고, 등산복으로 갈아입었다. 여행이 길었던 나와 퇴근 후에 온 친구이기 때문에 등산장비는 제주도에서 빌려, 전날에 미리 찾아두었다. 장비는 봄 1인 세트로 등산화, 배낭, 스틱, 모자, 장갑, 방석에 보온병을 추가로 빌렸다. 그 외의 준비물은 김밥, 라면, 물 1L, 뜨거운 물 1L, 파워에이드 500ml, 미니 초콜릿 3개, 미니 소시지 3개를 가방에 넣었다. 뜨거운 물은 봄이어도 정상은 춥다는 말에, 라면 외에 차라도 마실까 하여 가득 담아 올라간 것이었는데, 나중에 후회했다. 차라리 물을 500ml 더 가지고 갈 걸 생각했다.
새벽 5시 20분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입구에 도착 후 준비운동을 하고 등산을 시작했다. 코스는 관음사코스에서 성판악코스로 내려오는 것을 택했다. 관음사코스가 성판악코스보다 조금 어려워도 경치가 예쁘다고 했고 정말 올라가다 보니 산맥이 정말 아름다웠다. 언제였던가 가족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한라산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 이래"
"그래? 평생 올라갈 일 없겠다. 그냥 여기서 볼래."
정말 확고하게 대답했던 내가 한라산에 오르다니 내내 신기할 따름이었다.
물론 중간중간 고비는 있었다. 관음사코스는 계단의 연속이었다. 심장 박동수가 계속 높은 수치를 유지해서 인지 심장이 쪼이듯 고통스러웠다. 등산할 때 심한 가슴 통증이 오면, 원래는 중도 하산을 해야 안전하다. 조금 쉬면 괜찮을 것 같아서 친구를 먼저 올려 보냈다. 각자의 페이스 대로 천천히 올라가기로 한 것이었다. 친구는 먼저 올라가다 쉬면서 나를 기다려주기를 반복했다. 마라톤에 페이스메이커가 있듯, 친구는 등산 페이스를 조절해 주었다. 심지어 물 마시는 타이밍까지 알려주며 적절히 수분 보충을 시켜줬다. 등산할 때 물배 차는 것이 싫어서 보통 물을 안 마시는데, 땀을 엄청 흘리기 때문에 수분 보충을 안 해주면 진짜 탈진할 수도 있었다.
정상에 거의 다 왔을 때 점심을 먹는데, 역시 산에서 먹는 김밥과 라면은 꿀맛이다. 그렇게 한라산에 올라간 첫 번째 이유는 달성했다. 참고로 화장실에 라면 국물을 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국물은 다 마셔야 한다. 예전에는 라면을 5천 원에 팔았다고 하는데, 우리가 갈 때는 팔지 않아서 물과 라면 모두 챙겨가야 했다.
꿀 같은 식사를 하고 정상에 오르니,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던 백록담을 보았다. 날씨가 약간 흐렸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백록담이 보여서 다행이었다. 물론 4월이다 보니 푸릇푸릇하지는 않았지만, 보았으니 그걸로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고 나서 우린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섰다. 친구는 등산앱에서 인증을 하기 위해서였고, 나는 언제 또 올라오겠나 싶어서였다. 그런데 줄은 1시간을 기다려야 찍을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둘 다 목표가 있었기에 줄을 기다렸다. 앞에 10명의 단체팀이 있다면, 각각의 개인샷 + 단체샷을 찍으시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모두가 고생해서 올라왔기 때문에 각자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서로 존중했다. 긴 기다림 후에 귀한 사진을 찍고 하산을 시작했다.
내려올 때는 지쳐서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나중에 친구는 내가 화가 난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단 한마디도 할 기운이 없었다. 마실 물이 조금 부족할뿐더러, 5시간 등산에 이미 지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친구가 나를 불렀다. 바로 앞에 사슴이 있던 것이었다. 일전에 방문했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사진작가님이 이야기를 해주신 바론, 고라니와 달리 사슴은 엉덩이가 하얗다고 한다. 죽기 일부 직전의 나의 눈앞에 엉덩이가 새하얀 사슴이 보였다. 친구는 이제야 웃는다며 말을 붙였다. 그때까지 내 표정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인지도 못하고 걷기만 했다.
표정이 좋지 못했던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여행 내내 챙기고 다닌 무릎 보호대를 안 챙겼기 때문이다. 장시간의 재택근무를 양방다리로 했더니 무릎이 안 좋아진 상태였고, 하산하는 중에는 계속 무릎에 대미지가 가해졌다. 만약 한라산을 간다면 위에 말한 모든 준비물도 중요하지만, 무릎보호대도 필히 챙기기를 추천하고 싶다. 어찌저찌 우리는 4시간 반 만에 하산을 했고, 한라산 등정 인증서도 뽑았다. 이로서 내가 한라산에 온 3가지 이유는 다 이루고 덤으로 사슴도 보았다.
한라산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두 가지를 뽑자면, 하나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한 분의 추천 덕이었다. 그냥 앞사람 발만 보고 따라가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왔는지 신경 쓰면 시간이 안 갈 거라는 말을 들었고, 앞만 보고 가니 정말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은 일절 하지 않고 올라갔다. 그저 힘들어 죽을 것 같으면 전날밤 들었던 동요를 불렀다.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해 주세요. 그럼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다른 가사는 모르는데, 이 구절만 읊다 보면 적어도 한걸음 옮길 정도의 힘이 났다. 그래서 계속 같은 구절을 중얼거리며 올라갔다.
당연한 두 번째 이유는 친구 덕이었다. 친구의 제안이 없었다면, 애초에 한라산 등산은 인생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페이스 조절에 수분 조절까지 해주며 같이 힘든 길을 함께 걸어준 친구에게 글을 쓰며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 날이 제주도 여행을 와서 가장 뿌듯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