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나올 준비를 하다 보니,
난 마케팅도 해야 하고 세일즈도 해야 하고 카피라이터도 되어야 하고 회계도 봐야 하고 운영도 해야 하고, 포장된 외관에 외형에 비해해야 하는 역할들은 작디작은 일부터 수십이 넘어 보인다.
이미 자리를 잡은 듯 보이는 이들을 다양한 채널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은행을 퇴사하고 지난 8년간 좀 더 용기를 내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생긴다. 좋은 '자리'에 연연하기도 했고, 드러내기 좋은 '직급'을 중시하기도 했다. 시선이 그런 곳에만 꽂혀있던 시절이었음에도 가끔 제정신이 돌아올 때면 나 스스로에게 안부를 묻고 안쓰러워하기도 했었다. 쉼 없는 일주일을 여러 해 보내고 퍼지기도 했었지만 다시 일어나 또 달렸다. 그게 멋있는 거라 생각했다. 인사치레든 뭐든 남들이 많이들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다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게 어리석었다. 드러나게 빛나는 곳을 파보았더니 별것 없더라는 쓴소리를 들어가며 버텨왔던 시간들을 딛고 홀로 선 지금은 어떻게든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대안은 '약한 이들의 위안' 일 뿐이라 폄하했었다.
그럼에도 많은 교훈을 얻었다.
결국 끝에는 사람이 남고 사람이 전부라는 것을.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기복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흥에 겨울 때도 있어 그 감정을 섬세하게 담아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리더가 필요하고, 그들을 신뢰하고 합리적인 위임의 체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리더가 먼저 존중해주지 않는 관계에서 개인의 역량을 초월한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조직도 저런 조직도 있지만 공통적인 모습은 늘 변함없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래서 더 나 스스로를 챙기고 나의 중심을 내가 잘 잡고 있어야 휘둘리지 않으며 나의 생각과 의견을 조직에 전달할 수 있다. 부당함에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 희생 재물이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이상주의자들이 기대하는 수준에 비해 조직은 훨씬 야만적이고 비이성적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잖아'라는 말이 빈번하게 오가는 조직은 그래서 더 위험하다.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그 교훈을 얻기 위해 고육지책을 쓸 필요는 없다.
독립 선언부터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는 고되고 처절했으며 쓰라린 지난 기억들의 합집합이다.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난 후 투쟁의 역사는 유의미하게 기억된다. 그 투쟁의 산물이 나의 미래이고 분투의 주체가 나 자신이라면 내 생의 역사를 어떻게 써내려 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