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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보고 싶어(1)

서문

by 권수아 Feb 09. 2025

일러두기: 나는 박현욱 작가의 작품들 중 장편소설 <새는>의 챕터 'bonus track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과 단편소설집 <그 여자의 침대>의 단편소설 <해피버스데이>를 인상 깊게 읽었다. 이어질 'K가 보고 싶어-서문'은 이 두 작품에 영감을 받아 '-습니다'체로 쓰일 것이며 또한, 사실을 기반에 둔 픽션임을 미리 일러둔다.


 그때, 저는 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능 전날까지 게임을 했으니, 수능을 잘 보았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가족과 친척들에게 '빈 껍데기'라든지 '헛똑똑'이라든지 하는 말들을 들어야 했었고, 수능을 한 번 더 보았으나 처음 본 수능과 다르지 않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복학을 했습니다. 당연히 돌아온 대학교에 친구는 없었습니다. 강의를 시작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는데 강의실에는 저를 포함해 세 사람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수업하는 거 맞아요?"

 제가 용기를 내어 두 사람에게 질문했습니다.

 "책자에는 그렇게 나와있는데요."

 "그러게요."

 이 대화를 시작으로 저는 두 사람이 유학생과 복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조교님이 이 강의실에 오셨습니다.

 "너희, 왜 여기 있어? 과대표가 강의실 바뀐 거 전달 안 했어?"

 우리는 늦게나마 조교님이 알려주신 강의실로 이동을 했습니다.

 "너네는 왜 늦게 오니? 빨리 와서 앉아."

 것이 K와 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K는 쉬는 시간 없이, 그리고 약 10분 더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그 유학생과 복학생은 수강정정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쉬는 시간도 없고, 늦게 끝내주고... 전 별로네요."

 하지만, 저는 열정적인 K의 강의를 계속 듣고 싶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K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둔하디 둔한 저는 제 마음조차도 뒤늦게 깨달았지만요. 아무튼, 저는 K의 강의를 화요일에 두 시간씩 두 번, 중간에 한 시간을 쉬고, 그렇게 듣게 됩니다.

 저는 샤워를 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그때도 저녁에 집에 돌아와 몸을 씻는데, 갑자기 강의 때 K가 어준 <황조가>가 떠올랐습니다.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與我歸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울사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제 안의 자아가 외쳤습니다. '뉘와 함께 돌아꼬, 라니. K와 함께 돌아가지!' 저는 제가 K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황조가>를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과는 달리 K는 '거기' 혹은 '학생'으로 저를 불렀습니다. 동영상을 이용한 강의를 할 때, 가장 왼쪽 앞자리, 스위치에 가깝게 앉은 저에게 "거기 학생, 잘 보이게 불 좀 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죠.

 그리고, 얼마 뒤 스승의 날이 왔습니다. 저는 어떻게라도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커피 상품권을 준비하고 서투르게나마 제 마음을 담은 편지랄까 카드랄까 하는 것을 썼습니다. K에게 다가가고 싶었으나 그는 틈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K강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강의실을 나가거든요. 그래서 저는 거의 K의 앞을 막다시피 하고, 제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게 뭐지?"

 "그... 스승의 날..."

 "알았다."

 다음 주 강의 시간에 K는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말했습니다.

 "누가 본인 이름 불러달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학생이 한둘도 아니고."

 스승의 날을 핑계 삼아 K에게 전한 종이 위에 저는 저를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했지요. K의 말을 듣는데 어찌나 서운하던지요. 그러면 안 되는데,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주에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 않았겠어요. 앞서 저는 K의 강의를 중간에 한 시간 쉬고 두 시간씩 두 번 들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첫 번째 강의가 끝나면 두 번째 강의를 하는 강의실 앞에 있었습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두 번째 강의를 하는 강의실 앞에는 사물함이 있어서 제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등 뒤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수아야." 저는 뒤돌아보았습니다. K였습니다. "너 나 좋아하니?" 저는 "네"라는 말 대신에 K의 까칠한 뺨을 어루만졌습니다. 저는 "좋아해요."라는 말 대신에 K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만히 대었습니다. 내 첫사랑, 내 첫 입맞춤...을 이루기도 전에 저는 뒷걸음질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비어있다고 생각한 복도의 저 끝에 학생들이 는 소리가 들렸거든요.

 그 뒤로 저는 K만 보면 얼굴이 화끈거려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K는 신윤복의 <미인도>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미인도>에 있는  시도 K가 가르쳐준 거예요.

盤薄胸中萬化春

筆端能與物傳神


이 조그만 가슴에 서리고 서려 있는, 여인의 봄볕 같은 정을

붓끝으로 어떻게 그 마음까지 고스란히 옮겨 놓았느뇨?


 제게 있어 이 시에서의 '여인의 봄볕 같은 정'은 K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주석 선생님은 저서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에서 '아득하니 저 멀리 높이 있어서 도저히 제 품에 넣을 재간은 없고, 그렇다고 연정을 사그라뜨릴 수도 없으니까 이렇게 그림으로라도 옮겨 놓은 것 같아요.'(207p)라고 신윤복의 <미인도>를 풀이하셨는데, 제 마음이 꼭 그러하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여인도 되었고, 신윤복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2010년의 봄이 나가고 있었습니다.

 학기의 끝으로 시험을 보았습니다. 저와는 달리 많은 학생들이 한문이 주가 되었던 K의 강의와 시험을 어려워했습니다. 로선 어떻게 그토록 사랑한다는 K의 모든 것들을 잊을 수 있었겠어요. 이것 보세요. 1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잖아요. 시험 마지막까지 남은 학생은 저였습니다. 그리고 K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두 권의 책을 주었습니다.

 "즐거웠어."

 "제가 많이 좋아해요."

 "그건 나도 알아. 안녕."

 K가 어떤 의미로 책 두 권 <구운몽>과 <깐깐한 독서본능>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리석게도 K의 전화번호조차 묻지 못했습니다. 서울로 가는 셔틀버스 안에서 K가 준 책 두 권을 꼭 쥐고 울었습니다. 그래도 다음 학기가 있음을 기대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K는 적어도 제가 아는 세상에서는 증발했습니다.

 지금 K를 추억하는 글을 쓰며 문장 하나를 되뇌고 있어요. 'K의 ( )이/가 보고 싶어.' 괄호 안에는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단어라도 들어갈 법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K가 생각나지 않는 방법은 없는 듯합니다. 원래 첫사랑이란 이 걸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K가 남긴 두 권의 책을 다시 읽어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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