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만에 서울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퇴사도 했던 터라 이런 폭우는 내게 '오전에 일어나도 저녁같이 흐린', '빗소리가 크다, 작다' 정도로 느껴질 뿐이었다. 비가 억수로 내렸다가 잠잠히 그치다가를 반복했던 오늘, 이런 폭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나는 예정되어 있던 저녁 일정을 나갔다. 물론 약속을 나갈 때도 비는 억수로 쏟아졌다. 나가면 분명 바지도 신발도 다 젖겠거니 싶어서 잘 마르는 재질의 옷과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외출한지 한 10분쯤 되었을까, 다시금 비가 그치고 하늘이 조금 개는 듯했다.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도착해서도 비는 세차게 내리지 않았다. 지인과 만남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역에서 내려서 집까지 걷는 길에 바지가 다 젖겠는걸, 생각하면서 지하철 어플을 켰는데 레드박스로 '개봉~오류동 선로 침수로 1호선 운행에 차질'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사실 그 메시지를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정상운행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지하철 안내방송은 처음엔 '바쁘신 고객님께서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였다가 '구로역 2,3번 출구로 나가 88번 버스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로 바뀌었다. 곧 정상운행되지 않을까 하며 기다렸던 나와 역사 안의 사람들은 그 안내방송을 듣고 출구로 나왔다. 하지만 어디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겠는가. 88번 버스는커녕 정류장을 스치는 그 어떤 버스도 탈 수 없었다. 그 뒤 택시를 잡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지만 고배를 마셨고 안되겠다 싶어 숙박시설에 하루 묵어야겠다 생각하고 근처 호텔을 가봐도 만실이었다. 결국 24시 무인카페에 들어가서 첫차가 뜰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카페 유리창 밖으로는 다양한 택시가 오고갔다. 나도 열심히 택시 어플로 호출을 했지만 쉬이 잡히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새벽 2시쯤이 되자 택시를 잡은 사람들은 짧은 탄성을 내지르며 카페 밖으로 나갔고, 누군가는 00동까지 가는데 같이 갈 분 없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어떤 이는 피곤함에 못 이겨 엎드려 잠을 청하기도 했다. 나는 지하철로 이동할 때 읽은 책을 소지하고 다니고 있어서 카페 안에서 책을 읽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머리도 굴려보고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무인카페에서 첫차를 기다려야 하는 결론에 도달하니 그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집에 있다면 '아, 자야 되는데...' 하면서 유튜브 영상을 헤엄치고 있었겠지만, 그것도 집이라는 장소의 안정감 덕분에 할 수 있었던 거구나 싶었다. 카페에서 두어 시간을 보냈을까, 첫차까지 남은 시간이 3시간 남짓일 때 택시를 호출할 수 있었다.
시간도 늦었고 택시 잡는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택시기사님이 정말 영웅처럼 보였다. 빗길을 쌩쌩 달리는 차 안에 있으려니 조금은 무섭기도 했지만 그래도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고속도로를 탈 때는 구급차도 종종 보였다. 이 늦은 시간에도 누군가는 움직이고 있고, 그로 인해 내가 평온하게 살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리는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알게 됐달까. 카페에 있던 밤늦은 시각. 처음에는 호기롭게 첫차까지 기다리지 뭐,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갔었다. 책을 읽어도 집중력은 떨어져 가고 그나마 같은 처지에 있는 카페 안의 사람들에게 그 존재로 위로를 받았다. 이 지난한 시간을 3시간 더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참 마음이 어려워져 갈 때, 택시가 잡힌 것이다. 40분 만에 집에 도착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 어제 사두었던 편육을 먹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직 첫 차 뜰 시간이 되지 않았다.
어제에서 오늘로 넘어간 그 사이 시간에, 우리네 일상에 너무나 당연해서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들이 얼마나 단단히 삶을 지탱해주고 있었는지를 알게 됐다. 버스, 지하철, 택시... 우리네 인생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수록 그 중요성을 쉽게 잊곤 하지만 위기상황일수록 그러한 존재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 주신 기사님들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만들어주는 집이 있음에도 감사하다.
누군가의 노력, 희생으로 열심히 지켜지고 있는 이 일상을 나 또한 열심히 살아내어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응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