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맞아 아이들과 성수동에 있는 헬로뮤지움의 예술책 도서관<라보>를 방문했다. 도서관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관찰하는데 아이들의 그림책 읽기는 자발적 선택으로 시작해서 그림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상상하는 말놀이로 이어졌다. 아무리 봐도 그림책 읽기는 배움보다는 놀이에 더 가까웠다. 특히 <라보>에는 글씨 없는 그림책과 예술책들이 더 많아서 그런지 아직 한글을 모르는 둘째도 반시간 정도는 엄마를 찾지 않고 스스로 여러 권의 그림책 보며 상상하며 말하기를 시작했다. <라보>에서 그림책을 읽는 아이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문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림책 읽기도 아이들의 자발적 선택과 즐거움이 있다면 놀이가 아닐까?'
첫째는 책을 좋아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책을 읽는다. 하루 일과 중 틈이 날 때면 이런저런 책을 찾아서 보기도 한다. 에그박사, 아르센 뤼팽, ~78층 나무집, 전천당, 십년가게, WHY? 등등 종류는 다양하다. 첫째는 돌도 되기 전부터 아빠가 동화책, 소설책, 신문 등을 가리지 않고 읽어줬었다. 그게 이유였을까? 첫째는 둘째보다 확실히 책을 좋아한다. 퇴근 후 아빠가 읽는 신문, 경제도서 등에 관심을 가지면 아빠는 소리 내어 책을 읽었고 첫째는 내용을 이해하고 듣는 거지 그저 아빠의 품이 좋았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첫째는 가만히 안겨 아빠와 함께 책을 읽었다. 영아들에게 책은 어른들의 책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영아기 때 아이들은 책에 무관심한 아이들은 있어도 책을 학습의 도구로 여기며 거부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는 없다.
영아의 그림책 읽기를 관찰하면 영아의 책 읽기는 분명 학습보다는 놀이의 영역에 더 가까웠다. 어른들이 만화책을 보거나 좋아하는 소설책을 읽으며 공부라고 말하진 않는다. 아이들도 그림책을 보면서 자신의 취미 생활을 즐긴다. 내가 원하는 책을 내가 원하는 시간에 본다는 것은 어른들에게 취미가 되는 것처럼 아이들에겐 놀이가 된다. 책을 들었다고 해서 공부가 아니고 모든 책이 교육의 목적을 담당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영아기 땐 자신이 원하는 책을 고르고 그걸로 쌓기 놀이를 하든 제 손으로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감각을 느끼며 손끝 훈련을 하든 아이만의 자유 시간을 주어야 한다.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놀이를 선택하고 반복하며 누구도 모르는 자신만의 것들을 완성해 나간다. 그건 학습을 이어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잘 놀아야 공부도 잘 한다(EBS다큐 핀란드의 영유아 교육 참고)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송은(2006)의 연구는 책을 처음 접하는 2세 전후의 영아가 책에 대해 보이는 반응을 6개월에 걸쳐 관찰하였는데, 영아들은 처음에 그림책의 외형적 특성에 집중하여 책으로 집을 짓고 길을 만드는 등 그림책을 놀잇감으로 다루었다. 즉, 영아는 성인의 간섭이나 제지가 없는 상태에서 그림책을 놀잇감으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아이가 책을 좋아하길 바란다면 어려서 책과 함께하는 것은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라는 느끼게 해 주면 좋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 어릴 적부터 근처 도서관엘 자주 갔었다. 책을 읽으러 간다기보다는 책방 나들이에 더 가까웠다. 아이들은 집이 아닌 밖으로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근처에서 간식도 사 먹으며 놀다 오니 좋았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지금도 도서관에 가는걸 놀이터에 가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성수 책마루
아이들과 그림책 도서관 <라보>에 있는 그림책을 보면서 이제 더 이상 이 그림책들은 아이들만의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고 내 손 위에서 나만의 예술 작품이 되어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단순히 내가 알던 그림책, 동화책이 아니라 예술의 한 영역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그림책으로 교육받는 시기가 아니라 예술을 배우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라보>에서 본 그림책은 아름다웠고 어른으로서도 소장 가치를 느꼈다. 그만큼의 가치 있는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분명 이 책들은 하나하나 완벽한 예술 작품이었다.
그림책 언어의 독특성과 독자층의 다변화 현상은 현대의 그림책 작가들이 더 이상 그림책을 '교육적'이라는 틀 안에서 창작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림책을 독특한 예술의 장르로 발전시킨 그림책 작가들은 좁은 의미에서의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탈피하여 그림책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그림책에서 볼 수 없었던 현대 회화의 표현 양식을 도입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글과 그림 언어를 선보이면서 그림책을 고유한 예술 장르로서 발전시키고 있다. -현은자, 김현경(2007)
전시 관람이 끝나고 그림책을 보는 곳으로 나오면 중간에 색연필과 종이가 놓인 공간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아이들은 오늘 나무를 많이 그린다. 책을 넘길 때마가 계절이 바뀌며 나무의 변화가 잘 나타나는 팝업북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모든 놀이를 끝낸 둘째가 이제 글씨가 있는 그림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한글을 모르는 둘째는 책을 들고 나에게 온다. 오늘은 백희나 작가의 책이 마음에 드나 보다 어려서 구름빵 연극을 봤던 기억이 있었던 걸까? 백희나 작가의 다른 작품인 알사탕, 장수탕 선녀님 등등 줄줄이 가져온다. 오늘은 이 책들로 결정했나 보다. 알사탕은 오늘 처음 읽는 책도 아니다. 지금까지 10번은 넘게 읽었고 앞으로도 10번은 넘게 읽어야 할 것 같다. 점점 목이 아파오는 나는 오빠 찬스를 쓴 후, 혼자 전시관을 둘러보며 아이들에게 집중돼있더 나의 하루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