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소중한 것들을 너무 많이 놓쳐서.
살다 보면, 10년을 넘게 사귄 친구와도 종종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며 당혹스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얼굴을 마주한 우리 사이에는 항상 묘한 어색함이 흐른다.
못나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내 눈에 들보는 감추고 상대방의 티끌을 쳐다본다.
내 잘못과 부족함에도 나아갈 거라는 의지의 나열, 때로는 내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를 겸손함을 가장한 채 내뱉는 자랑.
알코올이 그 정도를 느슨하게 해 줄 때도 있지만, 적어도 내 인간관계는 감정의 나약함을 드러내길 서로 불편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내가 다름을 느낀 건 주방에서 친해지게 된 네팔 친구와의 대화에서였다.
그 친구는 교환 학생으로 한국에 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하는 친구였는데, 고향을 굉장히 그리워했다.
그 친구의 고향은 마을 인구가 20명 남짓의 한적한 시골, 힌두교를 믿는 다정한 사람들의 소모임 같은 곳이라고 했다.
그 친구는 고향에서 떠나 경쟁 사회가 만연한 서울의 일 문화(work culture)를 굉장히 힘들어했다.
그래서인지 그 친구와 둘이 이야기할 때면 어떠한 어색함도, 내 부족함에 대해 변명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 친구는 이성의 옳고 그름보단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위해 명상과 자연을 느껴 볼 것은 어떤지, 따듯한 물로 목욕하고 잠시 멀리 떠나는 상상을 해보는 것은 어떨지.
오감과 정서가 항상 예민해 충동적으로 일을 그르치는 나에게 그는 항상 '별 거 아니야 (it's not a big deal)' 라며 위로해 주곤 했다.
그는 나에게 너의 지친 몸과 마음을 너희 집 강아지와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회복하길 기도 하겠다는 문자를 남기곤 했었다.
그가 나에게 너무 좋은 친구였던 것은, 우리는 상사를 험담 하거나 내 잘남을 자랑하거나, 내 못남을 변명하기 이전에
겁먹고 놀란 나를 먼저 알아차리곤 별 일 아니라고 다정히 위로해주는 방식 때문이었다.
그의 고향에서는 경쟁보다는 자급자족이 중요한 문화였기 때문에 가족, 이웃과 오랜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돌보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고
그렇기에 잘남과 못남, 옳고 그름보다는 커뮤니티의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우리는 심화되는 경쟁에 놀라고 겁먹어 항상 울기 직전인 스스로를 외면한 채, 포기하거나 다그치기 십상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얼마나 무서워 떨고 있는지 발견할 여유조차 없어서, 자극적인 미디어나 알코올 따위로 감정을 무마시켜버리곤 한다.
또 다른 내 친구는, 올바르게 사랑을 받지 못해 극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20대 초반 꽃다운 나이에 극단적인 시도를 했었다.
그 배경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어른들의 사정과 그녀를 돌봐줄 사람의 부재가 컸었고, 입시에서의 실패는 그런 그녀를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경쟁으로 내몰려 실패하고 그런 그녀를 올바르게 위로해 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 그렇기에 스스로를 돌볼 방법조차 몰랐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그러나 그녀는 13층에서 떨어지고도 기적적으로 생환하여, 아직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이기도 벅찬데도 불구하고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병실에 앉아 수백 권의 책을 섭렵했는데, 책 속의 다정한 문장들이 그녀의 놀라고 비참했던 마음을 진심으로 어루만져 주었다고 한다.
병실을 공유하는 환자들은 대부분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녀를 항상 이쁘게 봐주고 덕담을 주고받으며 회색 병실에 장미 같은 그녀를 귀여워했다.
그렇게 그녀는 당장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이전보다 훨씬 행복하고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나아가 그녀는 그렇게 쌓아둔 다정함을 때론 나에게 베풀어 준다.
오늘도 힘내라고, 이번 주도 고생했다고.
난 사지 멀쩡히 돈을 버는데도 그녀의 위로에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그녀가 부럽기까지 하다.
그녀는 정말 멋있다. 정말 다정하다
경쟁 속에서 세상을 급히 따라가다 나 자신마저 놓쳐 버리고는 정비해야 할 때를 모른 채,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고 주먹을 움켜쥐기만 했다.
나는 내 못남을 변명하며 스스로를 지키기에만 급급해 안아줘야 할 때를 놓치고 자신이 느끼는 마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다음을 위한 채비를 하려는 조바심으로만 가득했다.
오늘 하루만큼은,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벌벌 떨며 울면서도 키를 잡고 있던 내 안에 작은 나를 따스한 햇살 같은 눈빛으로 안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