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교실의 어느 아침활동시간. 칠판에 딱 네 개의 알파벳이 적혀있다.
D.E.A.R.
(Drop Everything And Read. 딴 거 다 내버려 두고 책 읽어.)
딱 캐나다 초등학교와 어울리는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캐나다 초등학교에서는 하루 종일 책을 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점심시간, 아침자습시간에 짬을 내서 읽기도 하지만, 수업시간에도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는다.
그 이유는 초등교육을 위해 따로 정해진 국정/검정교과서가 없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의 모든 과목에 정해진 교과서가 없다. 대부분의 과목이 주제별 프로젝트 학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사가 해당 주제에 맞는 책을 선정하여 수업한다.
교사가 선정하는 책들은 교육을 위해 발행된 참고서가 아니라 모두 어린이 동화책이다.
예를 들어, 곰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면 곰을 주제로 한 창작동화, 곰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는 자연관찰 동화책, 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생활동화 등을 교실에 가져다 놓는다.
교과서가 없으니 당연히 지도서도 없다. 한국에서는 지도서를 바탕으로 교수학습지도안을 짠다. 물론 한국에서도 필요에 따라 가르칠 순서나 내용을 재구성하고 과목을 통합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지도서에 주어진 교육과정의 순서대로 가르친다. 하지만 캐나다에는 지도서가 없기 때문에 교사들이 교육과정 세부내용을 직접 구상한다. 과목별 통합을 통한 프로젝트 학습이 주를 이루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캐나다 교사의 책상을 보면 일 년치 교육과정을 모아놓은 바인더가 하나씩 놓여있다. 교육부에서 정한 학년별 성취기준을 토대로 교사들이 직접 구성한 교육과정이다. 이것이 캐나다 교사들의 '셀프 지도서'인 셈이다.
사실 이것은 교사에게 교육에 대한 엄청난 자율성을 부여한 것이다. 공통된 학년별 성취기준만을 가지고 어떤 주제로, 어떤 소재로, 어떤 방법으로, 어떤 순서로 가르치고 평가할 것인지가 모두 교사에게 달렸다. 그래서 캐나다 학교교육은 교사의 역량이 더욱 중요하다. 학교 현장에서 통용되는 '교사의 질이 교육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이 딱 맞는 시스템이다.
한국에서 모든 초등교사에게 이만큼의 자율성을 부여한다면 상당히 곤란할지도 모른다. 매 년 겨울방학마다 다음 학년 교육과정을 만드느라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캐나다에서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한국처럼 교사가 가르치는 학년이 매 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학교에 채용될 때 주로 맡을 학년을 정해놓는다. 따라서 교사의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일명, '선생님 메이드' 교육과정이 쌓이고 쌓여 재산이 되고 무기가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책으로 수업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교육적 유익이 많다.
첫째, 수업에 대한 정서적 진입장벽을 낮춰준다.
교사가 선정하는 동화책들은 참고서가 아니라 동네 도서관에 가면 널려있는 평범한 동화책이다. 어렸을 때부터 한 번쯤 읽어봤을 만한 유명한 동화책을 선정하기도 한다. 친숙한 소재는 학생의 흥미를 끈다.
"어? 우리 집에 그 책 있어요"
"저 그 책 읽어본 적 있어요!"
딱딱한 교과서 대신 스토리 형식의 친숙한 동화책은 수업에 대한 정서적 진입장벽을 확실히 낮춰준다.
둘째,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함으로써 문해력이 자란다.
저학년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과목을, 고학년의 경우에도 Language Art(영어), 사회, 과학은 거의 동화책을 통해 배운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독서 편식이 있는 아이라도 수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게 된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분야의 배경지식이 쌓이면 자연스레 문해력도 상승한다.
셋째, 책을 '들으며' 선택적 지각 능력이 자란다.
한국 초등 국어교육과 영역에도, 심지어 대학 수학능력시험에도 듣기 평가가 존재하지만 정작 학교 현장에 듣기를 위한 교수학습은 구체적이지 않다. 교사가 읽어주는 글을 듣고 요약하는 것이 자신에게 의미 있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선택적 지각 능력과 통합적인 언어기능능력을 향상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교과서가 없는 캐나다 초등학교의 고학년 교실에서는 주로 교사가 책을 읽어준다. 저학년처럼 카펫 타임을 가지기에는 그림보다 글밥이 많기 때문이다. 교사가 단위 시간에 한 챕터씩 읽어주면, 학생들은 정해진 활동지에 책 내용을 요약하며 들었다.
캐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일주일에 한 번씩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온다. “왜 이 책을 골랐어?”라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본 적 있으니까.”라고 답한다. 집에서 또는 수업시간에서 본 적 있는 친숙한 책에 구미가 당기는 것이다. 한국 학교에는 이미 정해진 교과서가 있다. 그러나 해당 학년 교육과정과 관련된 좋은 동화책을 많이 읽게 해 주고, 또 들려주면 어떨까.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읽어준 책과 어디선가 마주쳤을 때, 내 딸아이처럼 스스로 그 책을 집어 들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영유아 때뿐만 아니라 초등학생에게도 참 좋은 교육이다. 영유아 때는 엄마와의 소통과 애착형성이 가장 큰 이유라면, 초등학생 때는 학습적인 면에서도 유익이 있다. 하루 몇 분이라도 엄마가 읽어주는 책을 들으며 청각정보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할 수 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책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독서가 익숙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익숙함은 자발성을 만들고, 자발성은 꾸준함을 만들어 준다. 그렇게만 된다면 책 수업은 성공이다. 책에 스스로 손이 가기 시작할 때가 ‘프로 독서러’가 될 수 있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