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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색소폰 소리

2024.3.22.

by 친절한 James


"아, 또 시작이다."

"그러게, 오늘은 다른 곡이네."

멀리서 울려 퍼지는

차분하고 묵직한 음색.

싱싱한 나물 반찬에 흩뿌린

고소한 참깨처럼

검은 하늘 곳곳에

반짝이는 별이 가득한 6월의 밤,

한밤중의 색소폰 소리가

말간 어둠을 지나

귓가에 적셔들었다.


명치와 배꼽 사이 어딘가를

간질 듯 파고드는 음파의 진동.

가볍지 않지만 무겁지도 않은

그 음률은 뭐랄까,

깊지 않은 바닷속에서

물결에 나풀거리는

해조류의 움직임을

닮았다고 할까.

지금 사는 집에서

멀지 않은 해안에 뛰어들면

바로 만나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의 감각.


우리는 제주도 1년 살이 중이다.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하던 남편이

언젠가부터 많이 피곤해했다.

평소 운동을 좋아해 건강은 자신했는데

재작년 종합건강검진에서

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심한 단계는 아니었고

바로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

경과 관찰이 필요하긴 해도

고비는 넘긴 것 같다.


야근이 잦았던 남편은

그 일이 있고 많이 달라졌다.

자상했지만 시간을 많이 못 보낸

과거를 뒤로하고 부부가 함께 하는

순간을 더 많이 만들려고 노력했다.

몇 번의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일을 그만두고 좀 쉬고 싶다고 했다.

그래, 그게 좋을 것 같아.

그동안 당신 참 고생 많았지.

그리고 놀라운 제안을 했다.

"우리 제주도에 내려가서 1년 살까?"


아, 기억난다.

서로가 첫사랑이었던 우리,

부부가 되어 결혼 1주년 때

각자 소원 목록을 만들었다.

그때 공통 소원 중 하나가

'제주도 한 달, 또는 그 이상

생활해 보기'였다.

언제나 가보나 했는데 벌써?

하긴, 나도 가고 싶기는 했지.

그런데 좀 걱정이 되기도 하고.

"지금 아니면 못 갈 것 같아.

우리 아기도 가질 계획이니까.

그전에 먼저 우리 버킷 리스트

하나 이루고 가자."


그렇게 좌충우돌 한 달간 준비하고

마련한 제주도 보금자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돌담집,

크고 높은 건물, 편의 시설은 없어도

더 넓고 포근한 자연이 우릴 감싸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결심하기 참 잘했어.

지난달부터 들리던 색소폰 소리도

이젠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나도 악기를 하나 배우면 좋겠어요.

색소폰 같은 목관악기가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요즘 오보에가 끌려."

"그래, 그것도 좋지."

남편은 뭔가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존댓말을 한다.

2살 어린 연하지만 오빠처럼 포근한 면이 있지.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자.

이참에 나도 악기나 하나 배워볼까.

두 사람은 따뜻한 찻잔을 기울이며

깊어가는 밤의 여운을 한 모금 음미했다.


https://youtu.be/ZPLlUJNW8RE?si=nG2V4LcxLM2ZFhd2

한밤중의 색소폰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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