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쪽지를 남겼다

2024.9.13.

by 친절한 James


전화는 꺼져있었다.

"허..."

허무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E는 손에 작은 쪽지를 쥐고 있었다.

연노랑 종잇조각이

굵고 짧은 E의 손가락 사이에서 떨리고 있었다.

글씨는 흔들리듯 휘갈겨 있었다.

원래 또박또박한 필체가

E의 감정 때문에 삐뚤삐뚤한 걸까.


E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봤다.

화려한 싸구려 샹들리에가

뽀얀 먼지처럼 흐리게 깜빡거렸다.

"이 정도 방에는 저 등도 과분하지."

멀리서 기차 소리가 쿵쿵거렸다.

잊을 만하면 들리는 이 소리가

이곳의 정체성을 끔뻑거렸다.

역세권 모텔, 여기 이름이다.

다른 괜찮은 명칭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하필 역세권이라니. 하긴 그런 간판조차

없으면 기차역 뒷골목 구석에 웅크린

여기를 누가 거들떠볼까.

창문도 작고 옆집 벽과 손 내밀면 닿겠다.

해가 떴나, 날이 밝다.


E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푹신해 눈더미에 파묻히듯

허리가 잠겨버리는 침대는 누구 아이디어일까.

됐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경비를 아끼려고 합의한 거니까.

그런데 그녀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우리 둘 다 처음 와보는 낯선 도시에서,

야간 기차에서 내려 낑낑 짐을 옮기며

들어선 이곳, 물론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앞으로의 일정에 부풀어 첫 숙소는

그러려니 했지. 내일은 훨씬 좋은

7성급 호텔에서 머물 테니까.

그토록 그리던 그랜드 공원도 산책하고

사진도 찍고 맛있는 것도 먹고

놀이 기구도 타기로 했는데.

다 물거품이 된 걸까.


퍼뜩 정신이 든 E는

옷을 걸치고 프런트로 내려갔다.

프런트는 별 것 없었다.

낡아빠진 모조 대리석 판 앞에서

꾸벅꾸벅 졸던 청년이 눈을 떴다.

"뭘 도와드릴까요?"

"302호에서 혹시 한 여자분이

나간 걸 확인할 수 있나요?"

"언제쯤일까요?"

"새벽이나 이른 아침이요."

"네."

별일 아닌 듯

익숙한 상황인 듯 심드렁하네.

"CCTV는 확인해 드릴 수 있는데..."

"확인해 줘요."

E는 다급해졌다.

그걸 본다고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순간을, 그가 몰랐던 모습을

E는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저희는 복도와 입구에 CCTV가 있고

화질이 그리 좋지는 않아요."

시끄러우니까 빨리 찾기나 해.

이 말이 E의 입술에서 달그락거리다가

겨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진정하자.


"아, 혹시 이분일까요?"

청년이 모니터를 돌려주었다.

긴 생머리에 약간 탄 피부, 그녀다.

그런데 선글라스는 왜 꼈지.

저 파란색 원피스가 있었나.

처음 보는데. 신발은 그녀 것이 맞다.

뭐 그리 급하게 나갈까.

"이때가 몇 시죠?"

"새벽 4시 57분이네요.

그때 주무셨나 봐요."

알 만하다는 듯 사근대는 빈정거림.

짜증 나지만 일단 릴랙스.

그때면 한잠 중이었겠네.

하긴 어제 피곤하긴 했지.

씻고 잠들기 바빴으니까.

아, 잠들기 전에 캐모마일 차를

같이 마시며 여행 계획을 확인했지.

너무 졸려서 아침에 다시 보자고 했는데.

아... 설마.


"지금 몇 시죠?"

"6시 32분이요."

"오전이요?"

"아니요, 오후요. 저녁이요."

그것도 몰랐냐는 듯 핀잔 같은 말투.

시계를 안 봤다. 당연히 아침인 줄 알았지.

몇 시간이나 잔 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아침 7시면 눈뜨던 E였다.

어, 그런데 하루 숙박이라 체크아웃했어야 하는데.

"1박만 예약했었는데..."

"모르셨어요? 어제 여자분이 체크인하시면서

하루 더 연장한다고 했는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방으로 달려간 E는 곳곳을 뒤졌다.

그녀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휴지통을 들추니 비닐 약봉지가 보였다.

'취침 전'이라. 이걸 먹었던 걸까.

내가 씻는 동안 따뜻한 차를

준비한다고 했었지.

그녀는 요즘 잠이 잘 안 와서

처방받은 약이 있다고 했는데.

혹시 실수로 자기가 먹을 걸

내 찻잔에 넣었나. 아니야.

그럼 새벽에 황급히 나갈

이유가 없지.

이런 쪽지를 남겨두고.

E는 던져둔 메모를 다시 집어 들었다.

벚꽃처럼 흩날리는 글씨체,

그렇게 떠난 그녀.


'푹 쉬고 있어요. 좀 나갔다 올 거예요.

늦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어디로 갔을까.

어디에 있을까.

일단 나가봐야겠다.


그녀는 쪽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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