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안나 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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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29. 어촌총각 갑수 씨/평화

by 정의연 Jan 02. 2025

갑수 씨의 집은 파도소리 들리는 바닷가 언덕에 있었다. 서쪽으로 바다가 보이고, 남쪽으로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빛바랜 조개껍질처럼 앉아있는 세 칸짜리 조그만 일자 맞배지붕 집이었다. 나무로 된 사각기둥과 우물마루, 나무창틀… 집은 낡고 오래돼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삐꺽 옛날이야기를 들려줬다. 민속촌에 가야 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는 게 드문 양식이어서 오히려 새롭게 보일 정도였다. 본디 하늘색이었을 지붕 강판의 색도 자외선에 날아가 회색과의 경계에 있었다. 마당 끝에는 잎이 다 지고 잔가시만 무성한 해당화 숲이 아직도 탱탱한 붉노란 열매를 매단 채 틈 없는 울타리처럼 서있고, 장독이 놓인 뒤란 바깥은 비탈을 이룬 조릿대 숲이 두 팔을 벌린 듯 뒤바람을 막으며 집을 둘러싸고 있어 아늑했다. 주방과 거실 겸 안방 겸 침실과 다용도실이 세 칸을 이룬 집은 작고 낡고 삐걱거렸지만 안팎이 깔끔했다. 혼자 사는 갑수 씨가 어떤 사람인지 단박에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 집이었다.

      

바람이 없는 날 그는 혼자 자그마한 FRP 보트를 몰고 바다로 나가 하루 식비와 배 운영 비용을 댈 만큼만 물고기를 잡아 왔다. 어떤 날은 자하 한 주먹이 그날 잡은 것의 전부이기도 했다.

 

애걔걔, 겨우 요것 잡았네!


애걔걔? 겨우 요것? 너 한번 세어 볼래? 


바닷가에 놀러 온 도시 아이가 그가 한 손에 들고 가는 대바구니 속 자잘한 자하를 보고 실망하자 그가 버럭 화를 냈다.

 

자하 수천 마리가 애걔걔라고? 떼찌, 어린 사람이 생명을 그리 업신여기면 쓰겄남?


갑수 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육질이 부드럽고 가장 맛있다는 봄 주꾸미를 잡지 않았다. 마을사람들 다 잡아도 그 혼자 잡지 않았다. 알밴 고기를 어떻게 잡냐고, 거기 들어있는 수백, 수천의 새끼 씨앗들을 어떻게 한꺼번에 잡아먹냐고, 죄짓는 일이라고 눈을 부라렸다. 그는 그 알들이 자라 제집을 찾아 독립할 만큼 성장한, 날 맑은 가을에만 끈에 꿴 빈 소라들을 한 뼘 간격으로 엮은 줄을 미리 바닷속에 넣어두었다가 시차를 두고 당겨 소라 안에 들어있는 주꾸미를 잡았다.

 

너 이름이 뭐니?


안나를 집으로 데려온 첫날, 거실 겸 안방 겸 침실에서 그가 손에 든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그는 그때서야 처음으로 안나의 이름을 물은 거였다. 갑수 씨의 등 뒷벽 위쪽에는 1900년대 중반 처마 낮은 시골 이발소나 가정집 깊숙한 처마 밑 상인방 위에 걸려 있었던 밀레의 1857년 작 <이삭 줍는 사람들>이 이마를 기울여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조악한 복제품이었다.

 

안나, 안나입니다.


안나를 들여다보던 갑수 씨의 시선이 머문 곳, 안나의 등 뒷벽에는 밀레의 또 다른 작품 <저녁종>이 걸려있었다. 안나는 음울하게 마주 보고 있는 두 그림이 자신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나, 안나? 너무 도시스럽잖니? 이런 촌간에는 촌스런 이름이 좋은데…. 미자 어떠니, 미자?

 

안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뭐 대수랴 싶기도 하고, 갑수 씨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도 마땅치 않아서였다.

 

그래, 미자! 너는 이제부터 미자다. 나한테는 미자다.


갑수 씨가 어린아이처럼 외쳤다.

 

내가 처음 마음 준 처자가 미자였거든…


이내 갑수 씨는 겸연쩍어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의 말끝은 쓸쓸한 기운에 잠겨 스르르 사라졌다. 갑수 씨의 눈에는 미자가 가득 담겨있었다. 안나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그의 미자였다.

 

주책맞게 내가 밑도 끝도 없는 소릴 했구나! 농담이야, 농담.

 

무표정하게 그를 빤히 쳐다보는 안나를 본 그가 정색을 하며 자신의 말을 금방 정정했다.

 

너는 안나야, 그냥 그대로 안나. 말년의 내게 온 처음의 미자 같은 안나!


안나가 그의 말뜻을 다 헤아리기도 전에 벌써 그의 눈에는 안나가 가득 담겨있었다. 안나는 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모르겠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의 눈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여태까지 안나가 어떤 인간에게서도 보지 못한 눈빛이었다.


그가 바다로 눈을 돌리면 그 눈에는 바다가 그득 담겼다. 그는 그렇게 무엇이든 보이는 대로 담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안나는 자신의 뭉친 마음이 한낮의 햇볕에 닿은 얼음처럼 저절로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한겨울이었다. 서쪽 바닷가는 눈이 자주, 많이 내렸다. 그리고 빨리 녹았다. 특별히 할 일이 없는 갑수 씨는 안나와 함께 집에서 지냈다. 덕분에 안나는 거친 파도소리를 들으며 60대 어촌총각 갑수 씨와 24시간 함께 했다. 창가에 나란히 앉아 눈 내리는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갑수 씨와 웃음을 나누고, 식사시간에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가 먹는 모습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니가 사람이면 나한테까지 오지 못했겠구나!


갑수 씨는 안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흐흐 웃었다.

 

밤이 되면 갑수 씨는 안나를 자신의 침대로 데려가 팔베개를 해주며 같이 자고, 해 뜨는 아침을 같이 맞았다. 안나는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그가 기척을 하기 전까지는 그대로 가만 누워있었다. 안나는 아침에 눈을 떠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좋았다. 그의 눈에서는 부드럽고 따뜻한 그의 마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조용하고 차분하고 강단 있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안나는 그가 왜 여태까지 총각이었는지 헤아려지지 않았다.

 

나이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가 섹스를 밝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안나는 그래서 평안하고 그래서 미안했다. 전성기의 안나가 잘할 수 있었던 것을 갑수 씨에게는 해줄 수 없었다. 몸이 헐거워지고 질 근육의 탄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자신의 마음과 달리 애액도 잘 나오지 않았다. 안나는 그래서 속이 상했다. 그렇다고 갑수 씨에게 애액을 사서 자신의 몸에 부어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신 헐거움에 비례해서 삽입할 때의 통증도 같이 줄었다. 샛노랗게 물들었던 머리도 색이 날아가 지저분한 백발로 변하고 있었다. 몸과 모습의 변화는 갑수 씨도 마찬가지여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 정수리의 빈자리와 앞이마의 면적이 더 넓어져 있었다.

 

너를 좀 일찍 만났으면 어머니가 좋아하셨을 텐데….


지난해 어머니가 죽어 갑수 씨는 늙은 고아가 됐다. 비로소 혼자가 됐다.


내가 봇이라고 서러워하셨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가?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네!


갑수 씨가 손을 뻗어 안나의 지저분한 백발을 쓰다듬어줬다.

  

   

바람이 자고 날씨가 좋은 날은 갑수 씨가 안나에게 자신의 어머니가 입던 빨강 스웨터를 입히고 목에 노랑 모직 목도리를 둘려 잘 걷지 못하는 안나를 안고 소나무숲 아래 백사장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집 밖으로 나가도 안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갑수 씨가 이동제한장치를 다시 가동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가 깔아준 빨강과 노랑 체크무늬 담요에 앉아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 바다를 내다보고 있으면 몸과 마음이, 그리고 세상이 평온했다. 바다에는 징검돌 같은 섬들이 떠있고, 그 앞으로 고깃배 몇 척이 느린 시냇물 위 종이배처럼 한가롭게 지나고 있었다. 수면에는 수억의 윤슬이 축제의 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안나는 기댄 어깨에서 갑수 씨의 체온을 느끼며 그와 자신이 먼 나라에 여행 온 오래된 부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커피 한 잔 할까?


갑수 씨가 배낭에서 은빛 스테인리스 텀블러와 잔 두 개를 꺼내 잔 하나를 안나에게 내밀었다. 햇빛이 텀블러와 잔에 부딪쳐 또 다른 윤슬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안나는 자신의 몸에서 스르르 빠져나간 것들이 대부분 돌아와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의지였다. 여기 더 머물고 싶다는 희망을 붙잡고 싶은 의지였다.

 

마시고 싶은데 마시면 작동이 멈출 것 같아서요. 지금은 떠나고 싶지 않거든요. 지금은 정말 죽고 싶지 않거든요.

 

안나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마치 자신이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걸까, 자신의 목소리가 좀 슬프게 들리기도 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과 함께 있는 장소에서,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픔이고 아픔이었다. 갑수 씨도 그럴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안나는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안나는 처음으로 자신이 정말로 인간이었으면, 인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치솟는 것을 가까스로 눌렀다. 쓸데없는 욕심이고 가망 없는 욕망이었다.

 

미안, 미안! 내가 깜빡했네!


안나의 표정을 보고 갑수 씨가 서둘러 말을 거뒀다.

 

내가 더 미안하지요.


안나는 정말 미안했다. 자신이 이토록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얼굴조차 화끈거렸다. 그냥 바다로 걸어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군대 있을 때 폭파반이었어.

 

갑수 씨가 먼바다를 보며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폭탄 설치하고 지뢰 묻고, 제거하고…, 목표물이 폭발한 뒤에 보니 사람 말고도 참으로 많은 뭇 생명들이 갈가리 찢겨 죽어있더라고. 온몸이 찢긴 채 아직 숨이 붙어 오랜 고통 속에 파르르 떨며 죽어가는 것들도 있고…. 그때부터 생각이 많아졌어. 내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자연에 대한 약탈, 뭇 생명에 대한 수탈일 수 있겠다 싶더라고. 살아있는 동안 나라도 그런 약탈과 수탈을 최소화시켜야겠다, 생각했지. 자연을 망가뜨리는 공산품 사용을 최소화하고, 자연에서 최소한의 것만 가져다 생계를 꾸리겠다 생각했고. 이런 나와 함께 살겠다는 여자도 없었지만 내가 생산과 증식을 멈추는 것이 그 최소한의 실천이라고 생각했고. 내 목숨을 비롯해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숨을 끊어야 한다면 오래 고통 느끼지 않도록 단박에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제 몽골 유목민들은 가축이든 야생동물이든 짐승의 목숨을 끊을 때 그렇게 한다더라고. 그게 숨을 끊는 그 동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어쩔 수 없이 베푸는 선행이라고. 다 죄책감을 희석시키고 죄 닦음을 위해 갖다 붙인 것이겠지만.

 

바다를 바라보는 갑수 씨의 눈빛이 쓸쓸했다. 그 시절 그의 손끝에 흩어졌을 어떤 넋들이 아직도 그를 점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큰 배 여러 척을 부리던 아버지가 별다른 이유 없이 어머니와 나를 버려두고 거듭 다른 여자, 새로운 여자들을 만나 내 어머니와 같은 여자들 나 같은 자식들을 자꾸 만들어내던 것도 영향을 미쳤겠지. 살의가 뻗칠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으니까. 그 살의와 분노가 너무 오래 내 안에 머물렀는지 여자를 만나는 일도, 가정을 꾸리는 일도 내게는 관심사가 아니었어.


마치 거기 설치된 조각상처럼 멈춘 듯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갑수 씨는 오래도록 바다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외골수로 살았나 봐. 그러니 이 작은 동네에서도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겠지.


갑수 씨가 안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안나는 자신의 가슴이 쿵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갑수 씨가 지금 세상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라는 것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우리 미자, 아니 우리 안나한테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있어서 그것들이 내 입을 뚫고 나왔나 보다! 너는 그 모든 편견과 배제와 우려의 강을 건너 내게 온 선물이야!


갑수 씨는 서둘러 쓸쓸한 눈빛을 지우고 다시 부드러운 눈길로 안나를 보듬었다.

 

안나는 눈을 들어 바다를 봤다. 갑수 씨도 오래 안나를 바라보며 쓰다듬어주던 눈길을 들어 바다를 보고 있었다. 혼자 커피잔을 입에 대고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이 멋있으면서도 더할 수 없이 쓸쓸해 보였다. 안나는 또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안나는 그가 반찬을 만들고 밥을 해 먹을 때마다 자신이 조리를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를 위해 상을 차리면 그도 자신도 더 행복할 것 같았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오랜 시간을 들여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고 그 물로 커피를 내리는 정도는 할 수 있게 됐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안나는 진짜 조리를 해보고 싶었다. 간단한 것부터 도전해보고 싶었다. 안나는 갑수 씨가 조리하는 모습을 눈여겨 두었다가 갑수 씨가 없는 사이 해물된장찌개를 만들기 위해 갑수 씨가 준비해 둔 재료를 다듬고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그 순간 안나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칠 뻔했다. 불을 켜는 순간 달려든 화기가 칼로 포를 뜨듯이 살갗을 찔렀다. 손등이 금방 오그라들고 울퉁불퉁 일어났다. 뒤이어 칼로 저미는 듯한 통증이 쳐들어왔다. 안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자신의 존재적 한계가 너무 뚜렷해 가슴 아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전기 포트를 이용해 조심스럽게 커피를 내리고 잔에 따라주는 정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게 명백했다. 나중에 울퉁불퉁 오그라든 안나의 손등을 본 갑수 씨는 입으로 호호 불어주다가 안 되겠는지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비닐 주머니에 넣고 냉찜질을 해줬다.

 

안나 씨, 무리하지 마세요. 난 당신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더는 욕심이 없어요.


갑수 씨가 콧등을 찡긋 올렸다. 갑수 씨는 곧바로 팔을 걷어붙이고 안나가 만들다 만 해물된장찌개를 뚝딱 완성했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찬을 만들고 밥을 지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다가 가끔씩 안나를 바라보고 윙크를 했다. 안나는 행복했다. 안나라서 행복했다. 아니, 지금은 갑수 씨의 미자라서 행복했다. 처음 갑수 씨 집에 왔을 때 벽에 걸린 밀레의 그림에서 이따금 흘러나오던 저녁 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삭 줍는 아낙들의 허리 구부린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마칠 때까지 갑수 씨의 미자였으면 싶었다. 



평화

한겨울에 갑자기 코로나바이러스 33X가 창궐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백신을 맞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줄 서지 않아도 되는 봇들이 처음으로 행복해할 정도였다. 바이러스 확산의 주범이 수도권을 수시로 이동한 떴다텔로 확인되면서 전국의 떴다텔과 봇창가는 폐쇄되고 거기 있던 봇들은 독한 소독약 세례를 받은 뒤 폐기 처분됐다. 봇들이 한꺼번에 여러 개체씩 커다란 포클레인 집게에 잡혀 미리 파놓은 땅속 구덩이에 던져지고 묻히는 뉴스 화면을 보고 안나는 몸서리를 쳤다. 안나는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금 안나는 그럴 일이 없었다. 그럴 염려도 없었다. 지금 안나는 그때의 공용봇이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만 섬기는 개인봇이었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 마무리를 향해 그 복잡하고 험난한 세상을 벗어나 바닷가 오두막에서 조용히 현재를 동행하는 갑수 씨의 동반자였다.

 

안나는 더 바랄 게 없었다. 매일매일이 소풍 같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한 세상 존재하다 마감하면 정말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존재하게 해 준 갑수 씨가 너무 고맙고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이렇게 인연이 닿게 한, 감당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그동안의 모든 인연들도 고마웠다. 캠핑카 시절 손님이 놓고 간 핸드폰은 이미 버렸다. 지금은 그런 것이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그 핸드폰을 지니고 있을 때 위기 로봇 구조센터 소속 구출대에서 가끔씩 구출 의사를 묻는 메모가 들어왔지만 안나는 무시했다. 뉴스도 잘 듣지 않았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뉴스는 모두 봇 관련 뉴스가 빠지는 날이 없었다. 그런 소식,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런 삿된 기운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안나는 지금의 이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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