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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언 Nov 22. 2022

엄마손은 약손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생활한지 꽉채운 2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코로나19는 전 세계인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을 만큼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죠. 시간이 흘러 코로나19도 정복되고 유병률이 낮아지는 때가 오겠지만, 일상을 뒤바꾼 대표적인 전염병으로 역사에 남을겁니다. 


 1970년대에도 한국 역사를 뒤흔들 만한 전염병은 존재했습니다. 장티푸스와 결핵이 대표적이었죠. 지금에야 유병률과 치사율이 낮다지만 당시에는 한해 수천명의 사람들이 전염병에 걸렸고 치사율은 25%를 상회했습니다. 문제는 그 대표적인 전염병을 태용씨가 모두 겪어보았다는 것입니다.


"깔끔 떨면서 더러븐 병은 다 걸렸다이가."


  언젠가 동생 민희씨가 너스레를 떨며 했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유난히 깔끔한 성격이었던 태용씨가 어떻게 위생과 직결된 전염병들에 걸린 것인지는 아직도 미스테리입니다.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을 앞둔 태용씨는 몸이 아픈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기다려온 수학여행길에 오르지 않을 수도 없었지요.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열두시간을 달려 서울에 도착했건만, 태용씨가 기억하는 수학여행의 추억은 대부분 여관방에서 잠을 자던 기억입니다. 열과 복통이 시작되었거든요. 정말 아파서 고생고생한 수학여행이 아닐 수 없었어요. 워커힐 호텔과 청와대 입구를 구경한 기억이 단편적으로 나긴 하지만요.


  부산으로 돌아와 병원에서 장질부사, 즉 장티푸스를 진단 받습니다. 지금이야 유병율도 낮고 치사율은 1% 미만인 질병이지만 당시에는 심각한 질병이었고, 머리카락이 다 빠질꺼란 공포에도 떨어야했습니다. 전염병이다 보니 병결로 한달간 학교도 가지 못했고 칩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때 어머니 점연씨는 아들 태용씨를 정성으로 돌보았지요. 공기청정기도, 제대로된 소독용품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머니 점연씨는 온 집안의 창문을 열고 먼지떨이로 먼지를 떨고 손수 부채질해 환기를 시켰습니다. 아들 태용씨를 위해 위생에 더욱 신경을 쓰며 정성을 쏟은 덕택에 태용씨는 한달만에 병상을 털고 일어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군인이 된 태용씨는 다시 한 번 병을 얻습니다. 전투경찰로 입대한 태용씨는 360명중에 5등으로 수료할 만큼 훈련에 진심이었지요. 등수가 높아 원하던 1지망 근무지인 부산으로도 배치 받을 수 있었고요. 하지만 근무한지 1년만에 결핵에 걸리고 맙니다. 수술도 받아야할만큼 병세가 깊었죠.


  이때도 어머니 점연씨는 아들 곁을 지켰습니다. 결핵균이 퍼지면서 각혈을 시작했고, 그걸 다 씻어주시고 닦아주신 분은 바로 어머니 점연씨였어요. 다 큰 아들이 나라를 지키러 갔다가 덜컥 병에 걸려왔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요. 이번에도 어머니 점연씨의 간호 덕에 결핵도 이겨내고, 큰 후유증없이 결혼도하고 자식도 낳았다고 말하는 태용씨 입니다.


감염병 앞에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근래에 우리 모두가 깨달았듯이요. 하지만 어머니 점연씨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장티푸스에도 결핵에도 결코 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곁을 내어준 덕에 태용씨는 더이상 큰 병치레 없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요.


역시 엄마손은 약손이예요.


군 시절의 아빠. 뒤에서 강아지 흉내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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