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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Oct 21. 2023

사건의 지평선

이제는 놓아버린 너와의 시간들에 대하여

어떻게 지내?


참 사람은 어리석어. 찬란한 순간, 그 순간이 영원하기를 늘 꿈꾸게 되지. 그 덧없는 희망이 몇 번이고 우리를 나락으로 떨어트릴지라도. 다시 마주하게 된 찬란한 순간에 또다시 속아 버리고. 덧난 상처 위에 다시 붉은 상처를 덧 대고. 그러다 보면, 이 무상한 삶이 갑자기 턱- 하고 멈추게 되는 걸까?


너와의 순간도 그랬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늘 마음 같지 않은 일이지. 갑자기 훅 들어온 누군가의 존재. 오래도록 앓다가 기적처럼. 서로의 마음이 결국 같았다는 진기한 사실을 맞닥트리곤 어린아이처럼 뛸 듯이 기뻐하는. 몸도 마음도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가득 차버려서, 그렇게 달아올라버린 생경한 시간들이 온 신경을 깨워버리는 꿈만 같은 날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을 “현실”이라는 딱딱한 말로 정의 내리기엔 뭔가 늘 아쉬워. 너가 자라온 환경과 내가 자라온 환경의 간극. 그 간극이 결국 우리를 멀리 떨어트려 버리고 말지. 날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내 마음이 나의 불 품 없는 사랑을 잡아먹어버렸듯이, 너도 똑같이 내가 널 이해할 수 없음에 나라는 찰나의 순간을 놓아버렸겠지. 


말말말. 참 많이도 했어, 그렇지 않니? 우리의 마음을 말이 얼마나 진솔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나는 쉴 새 없이 너에게 말하면서도 내 말을 불신했어. 목구멍을 타고 흘려보내야 하는 그 불분명한 소리에 내 마음을 열성적으로 실어 날라야 한다는 그 피곤함 때문에, 나는 결국 입을 꾹 닫아 버렸지. 너도 같았을 거야. 신체 어딘가를 맞닿게 하기만 하면 고스란히 나를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 감정, 생각,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까지도, 너에게. 가끔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보곤 했어. 그만큼이나 나는 너가 날 제대로 바라봐 주기를, 기대했지. 뜨거운 마음으로. 동시에 차디 차게 식어가고 있던 그 마음으로. 


시간이 많이 흘렀어. 너와 나를 참지 못하게 했던 그 주제들은 이제 희미하기만 해. 그런데 참 이상한 게 말야. 너와 함께 있었던 어떤 풍경들은 내 안 어딘가에 영원히 멈춰 있어. 멈출 줄을 모르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조금이라도 멈추어 있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마냥 바쁘게 흘러가는 이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 정지된 화면 속의 너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아. 누가 지우개로 슥슥 지워놓은 것처럼. 얄궂게도 딱 그 부분만 흐리멍텅해. 결코 떠올릴 수가 없어. 몇 번을 그리곤 했던 그 얼굴을 이제 나는 몰라. 그치만 그 순간의 느낌, 온도, 습기, 감정 그런 온갖 것들은 내 안 어딘가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어. 그 따스함에 고단한 일상을 매달아 놓고 버텨 보는 현재들이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어.


순간에 머무르고 싶다는 애끓는 간절함이 그때의 온기를 내 속에 꽁꽁 숨겨 놓았던 걸까? 그렇다면 참 그 무상했던 나의 바람들이 무척이나 고마워. 가까스로 살아내는 앞으로의 날들이, 무용했던 지나간 기대 덕분에 겨우 가능하다는 게. 참 웃기지만, 웃기지도 않아. 


어느 순간을 공유했기에, 우리의 사랑은 무상하고 의미가 있어. 어떻게 보면 인생은 그런 건가 봐. 찬란할수록 시리게 아프고, 아름다우면서도 사무치게 슬픈. 무언가를 어딘가에 두고 온 것만 같은 애타는 순간들을 타오르게 앓다 보면, 언젠가 앓고 있는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되겠지. 


그러나 우리가 앓았다는 그 사실만큼은 이 세상에 어떠한 상흔으로 고스란히 남아 주기를, 또 어리석은 나는 그렇게 바라보는 거야.


사랑이 무언지 모르겠지만, 알 것도 같아. 사랑해 너를. 언제라도 널 사랑할 거야, 마치 영화 속 한 장면같이, 어리석은 약속이지만 이렇게 말할게. 결국 이게 이 세상의, 나의 전부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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