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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제대로 걷기

30년만에 만난 백록담

1992년 처음으로 한라산을 오른 후 지금까지 30년 동안 세 번 한라산 백록담을 올랐다. 두 번은 성판악에서, 그리고 한 번은 관음사에서 출발했다.


한라산은 제주도 사람이 아니면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다. 제주 여행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때에는 비싼 교통비와 숙박비를 지불하고 보내는 제주에서의 시간 가운데 하루를 온전히 빼기란 큰 맘을 먹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다가 아무리 마음이 간절해도 비나 눈이 내리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 한라산이었다.


한라산 백록담으로 오를 수 있는 코스는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 뿐이다. 영실이나 어리목, 돈내코 코스로는 윗세오름을 오를 수 있다. 성판악 코스는 9.6킬로미터로 4시간 30분이 소요되고, 관음사 코스는 8.7킬로미터이지만 5시간이 소요된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실제로 걸어보니 성판악 코스보다 관음사 코스가 훨씬 수월해 피로감이 적었다.


한라산 등산 코스


1992년 여름, 성판악에서 백록담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첫 산행은 처음 가는 길이 늘 그렇듯 힘들었다. 한번도 보지 못한 돌길을 계속 걸으면서 숱한 고생 끝에 백록담을 올랐지만 너무 지치고 힘들었던 탓이었을까. 백록담을 보고 무엇인가 느낌을 가졌던 기억이 전혀 없다. 


2012년 겨울, 다시 성판악에서 백록담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아이젠을 신고 의기양양하게 올랐지만 산 정상에서 눈보라가 너무 심하게 몰아쳐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움직이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백록담을 보기 위해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돌아서야 했다.


내 경험으로 결론부터 말하면, 성판악에서 백록담으로 향하는 길은 그렇게 가파르지 않은 코스지만 길고 지루하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오는 돌 길 때문에 진달래 대피소에 다다를 즈음이면 벌써 에너지의 절반은 고갈되고 만다. 정상을 앞두고 이어지는 가파른 돌 길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추천하는 코스가 관음사에서 오르는 길이다.




2021년 오늘, 아침 6시 50분에 관음사에서 백록담을 오르기 시작했다. 숲으로 들어서니 싱그러운 향기가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이른 시각이지만 벌써 사람들이 제법 있다.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사전에 탐방 예약을 해야 한다. 성판악 코스는 하루에 1000명, 관음사는 500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깊은 숲속에서 산행은 계속 이어졌지만 땅은 부드럽고 걷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2시간 후에 삼각봉 대피소, 10시에 한라산 정상에 도착했다. 계단이 좀 많았지만 돌 무더기 보다는 오르기 쉬웠다. 한라산 정상은 늘 그렇듯이 구름 속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큰 어려움 없이 정상에 오른 나는 마음을 편히 먹고 백록담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10여분 뒤, 사람들의 함성 소리에 일어나 보니 구름이 걷히면서 백록담이 모습을 선명해 드러냈다. 말 그대로 흰사슴(백록)을 탄 신선이 내려와서 곧 물을 마실 것 같았다. 백록담 맑은 물과 수풀의 초록, 구름의 흰색, 바다와 하늘의 푸름이 어우러지니 마치 천상의 모습 같았다. 


백록담


한라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제주시와 백록담 너머로 보이는 서귀포시가 더없이 예뻐보였다. 산, 구름, 바다, 하늘이 하나되는 백록담에서 제주도가 얼마나 신령스럽고 특별한 곳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아/름/다/웠/다.


다시 한번, 이번 제주 여행의 최애곡,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잠들지 않는 남도>를 들었다.


내려가는 길은 성판악이었다. 매번 기를 쓰고 올랐던 길을 편안히 내려가니 기분이 좋았다. 즐거운 마음에 어울리는 겁없는 노루가 나타나 한동안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오름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라오름'으로 길을 틀어 올랐다. 산정호수에는 잔잔한 물이 고여 하늘을 담고 있었다. 하늘호수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사라오름


그렇게 성판악 휴게소로 내려오니 오후 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오늘 하루 20킬로미터를 6시간 30분 동안 걸었다. 관음사 코스를 3시간 동안 걸었고, 성판악으로 내려오는 길에 사라오름에 들러 전체 3시간 30분을 소요했다. 


백록담을 진짜 만났고, 한라산을 제대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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