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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게 좋아 Jun 16. 2024

대기업 파견직 두 달만에 퇴사


대기업 파견직으로 근무한 지 두 달이 조금 넘어서 퇴사하게 되었다. 목요일에 마지막 출근을 끝냈고, 더 이상 그곳에 갈 일이 없다.


마음이 홀가분하면서도 착잡하다. 함께 일하던 사람과 마지막에 갈등이 생겨 별로 좋게 나오지 못 했다. 이 회사에 다니면서 현타로 괴로워하다 보니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싶지 않아 했고, 싹싹하게 다가가지도 않았기에 사직서를 작성한 후 홀로 조용히 회사를 빠져나왔다.


갈등이 생겨서 얼굴을 붉히고 나온 사람은 내가 원래도 싫어하던 인물이었는데, 내가 연차를 쓸 때마다 전화를 걸어와 업무를 공유해달라는 개소리를 했던 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나는 퇴사날 반차 후 오후 출근 예정이었다. 그런데 또 전화를 걸어와서 내가 문자로 휴가 때 연락하지 말라고 화를 냈고, 서로 안 좋게 끝났다.

이미 내 할 일은 거의 끝낸 상태였는데 내가 진행 상황 보고를 할 때 본인이 제대로 안들었는지 업무 공유가 아무것도 안 됐다, 인수인계가 아무 것도 안 됐다 지랄을 떨었다. 막상 출근 마지막 날 나는 회사에서 한 시간 안에 모든 일을 마무리했고 더 할 일도 없었다. 그러니까 반차를 썼던 거였고.


미친년인가 진짜.


출근해서 내가 한 업무들을 마지막으로 되짚어가며 정리해주자 그 사람도 더는 요청할 것이 없다고 했다. 이미 거의 끝난 일이었는데 왜 휴가를 공유해주지 않았냐 진행된 게 아무것도 없냐 하며 휴가 중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대는 걸까. 그 사람이 나를 믿지 못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네가 내 상사도 아닌데 왜 너한테 내 휴가 일정을 공유해야 되나. 당장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하루씩 연차만 쓰는 것인데. 너는 나한테 업무도 휴가도 아무것도 공유 안 하는데. 생각할수록 빡친다.


이곳에서 두 달 조금 넘는 기간 업무를 하면서 나는 일을 능숙하게 해내지 못 했고 실수를 하곤 했다. 그런 나의 모습들이 그 사람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것일 테지만 신입한테 완벽을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실수한 것들 인정하고 당시에 깔끔하게 사과했다. 그리고 실수한 건에 대해서는 야근해서라도 시정하고 다 끝냈다. 그럼에도 부족한 것들이 있을 테지만.


내 실수들 때문에 그 사람이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하는 일인데 어쩌라는 거야. 너는 입사 두 달만에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냐고.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고 내가 유능한 사원은 아니었음은 알지만 그 사람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대단한 악인이었다거나 나를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자기 실수에는 관대하고 본인보다 연차 낮은 타인의 실수에는 엄격한.


이 회사에서 하는 업무는 나에게 너무 맞지 않았다. 사수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업무 메뉴얼을 보고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야 했는데 그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아주 어렵거나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메뉴얼만 보고 모든 과정을 처리하는 건 쉽지 않았다. 전혀 경력이 될 수 없는, 사소하게 신경써야 할 잡무만 잔뜩이었기에 이런 부분이 더 일에 대한 사기를 떨어트렸다.


두 세달만 버틴다면 일이 곧 수월해질 것이란 건 알았지만 여러모로 회사에 불만이 많았기에 당장 처음 써보는 프로그램들을 다루고 업무를 진행한다는 게 많이 짜증났다. 물론, 메뉴얼은 전혀 완벽하지 않기에 써져있는 내용과 달라 일을 두 번씩 해야 하는 상황도 빈번했다.  


퇴사를 통보한 후로는 회사에 가는 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느낌이라 더 일하기 싫었다. 같은 과정을 진행함에도 파견직인 나에게는 일절 업무 공유를 하지 않는 정규직들의 태도는 소외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고 여러 부서에서 필요할 때마다 데려가 사용하는, 자기들 잡일에 돌려 쓰는 취급을 받았다. 그러라고 파견직으로 뽑은 거겠지만 소모품 느낌이 너무 강했다.


게다가 이것이 매우 건강치 못한 사고임은 알지만 내가 이 대학 나와서 이 취급을 받아야 하나. 내가 정규직들보다 못한 게 뭐냐는 생각이 나를 매우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신입사원이나 임원, 팀장들을 대상으로 사내 교육을 실시하는 부서에 있었기에 교육생들의 명단을 받는 일도 내 업무 중 하나였다. 임원이든 팀장이든 신입이든 언제나 우리 학교 출신들이 있었다.


내 동문들은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입사하고 임원까지 다는데 나는 같은 학교를 나왔음에도 여기서 최저임금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우울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꽤 많은 신입사원들의 출신 대학이 지방대인 것을 볼 때마다 현타가 거세게 밀려왔다. 물론 그들은 공대 출신이었다...  

어쨌거나 인서울 대학교 과 수석졸업생이라는 자의식이 이곳에서 나를 더 병들게 했음은 확실했다. 차라리 모두가 평등하게 파견직이라거나 하다못해 물류센터 같은 곳에서 일했다면 나는 이 정도로 현타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같은 환경이더라도 다들 나보다 월등하게 나이가 많았다면 막내라는 이름 하에서 괜찮았을 것이다.


사람은 환경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또래 정규직들 사이에서  그들 수발이나 들고 업무상으로 소외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심하게 자괴감을 불러왔다.  


나는 아직 어리고 사회 초년생이기에 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자의식을 내려놓고 해탈하려면 사회에서 얼마나 구르고 얼마나 나이가 들어야 가능할지...


이 회사에 면접을 볼 당시 다른 팀 팀장 두 명이 면접관으로 들어왔었는데, 나에게 좋은 대학교를 나왔는데 왜 공채로 지원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했다. 합격한 후에도 우리 팀 팀장과 면담하던 도중 그녀로부터 내가 이 회사를 다니며 다른 회사 입사를 준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전에 다른 계약직 면접을 볼 때도, 이번에 합격해서 당장 다음주부터 출근할 회사 면접에서도 같은 말을 들었다. 학벌도 좋고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공부를 잘하셨는데 왜 이곳에 지원했냐는 질문을 항상 들었다. 내가 지원하는 회사들을 가기에는 나는 고스펙이다.


내가 왜 이런 회사들에 지원했냐고.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서는 서류에서 다 탈락했으니까...

인문학 전공자가 갈 만한 자리도 별로 없고 학벌과 학점은 그런대로 괜찮아도 자격증, 인턴, 경험, 자소서 스킬 등등 다른 스펙이 부족하다. 나이도 많고. 그리고 사실 대기업 문과 직무로 지원하기엔 학벌도 부족하다. 이번 공채 신입사원들의 명단을 보고 있자니 진짜 취업이 목적이라면 공대를 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업에서 파견직으로 일하며 심적으로 꽤나 고통스러웠다. 만약 편하게 일하며 최저임금 정도만 받아도 괜찮다는 사람이 아니라 커리어를 쌓고 싶은 사람 중에 대기업 파견직을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정말 말리고 싶다. 대기업에서 일해도 소속이 파견직 회사이기  때문에 경력으로 인정되지도 않고 사무직은 물경력만 쌓고 나올 확률이 99퍼센트다.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한 20대 초중반은 6개월에서 1년 정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사회 분위기도 파악할 겸. 하지만 20대 중반이 넘어가고부터는 정말 안 하는 게 좋다. 사회 초년생도 1년 이상은 추천하지 않는다.


어느정도 나이 들어서 파견직 하면 정말 현타가 장난 아니다. 이미 굳건히 형성된 자의식 때문에 힘들다.  


다음주에 출근하기로 한 회사는 정말 영세기업인데, 거기서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오게 된다면 당분간은 회사를 다니기보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져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오래 전부터 즐겨보던 유튜브 영상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진정한 행복과 만족, 초월에 대한 영적인 영상이고 하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속성을 알려주는, 소위 돈 버는 방법에 대한 영상이다.


두 부류 모두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각자 맞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상을 볼 때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뒤돌아서면 잊는다. 당시에만 감명받을 뿐이다. 두 영상의 각 단점이 있다면 후자는 공포 마케팅을 이용해 사람의 심리를 자극한다.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원동력을 이끌어내려 하고, 전자는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고 정신적으로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실천하기가 더 어렵다.


솔직한 말로 나를 속박하고 괴롭게 만드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경제적 자유든 진정한 행복이든 다 때려치고 싶다. 예전이라면 각 영상에서 동기부여를 받았겠지만 이제 그런 지식을 얻고 고민하는 것조차 지쳤다는 생각뿐이다.


앞만 보고 달려온 대학생활을 끝낸 후, 5주간의 유럽 여행으로 충분히 휴식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인가. 하긴 5주 동안 휴식은 커녕 매일 열정적으로 쏘아다니며 저녁엔 피곤해서 쓰러지는 생활을 반복했다. 한국에 돌아온 주에 곧바로 원래 하던 주말 아르바이트에 복귀했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새 직장을 구해 출근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 번째로 직장을 옮기면서 방황하고 있다. 정말이지 난 요즘 인생에 길을 잃은 기분인데, 대학생 때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힘겹긴 했으나 당장 해야 할 공부가 눈앞에 있었고, 그 공부를 좋아했으니 삶의 목적이나 방향을 잃었다는 생각만큼은 들지 않았다.


지금은 그야말로 인생의 암흑기 같다. 첫 출근이 당장 내일이다. 새로운 상황은 언제나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또다시 새로운 업무에 적응해야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며 그들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일단 살아간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것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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