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전이 된 쪽파
아이들과 집에서 점심을 함께 먹으며 오늘 저녁에는 오징어와 쪽파를 넣고 부침개를 만들어 주겠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올해 초등학교 4학년 올라가는 아들이 2살 위인 누나를 돌아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오늘은 쪽파가 죽는 날이야.
아이가 한 말에 순간 어이가 없어서 "풋"하고 웃음이 나오려고 하면서도 아이의 순수한 생각과 표현에 놀라고 말았다. 아이가 그렇게 얘기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2월 초쯤 친정 부모님 댁에 갔을 때였다. 나의 부모님은 취미로 밭을 경작하고 계신데 부모님께서 그 밭에 가서 쪽파를 좀 뽑아오자고 말씀하셨다. 밭에 가서 보니 쪽파는 길이도 짧았고 많이 시들어있었다. 어머니는 쪽파를 뽑아서 칼로 쪽파의 위쪽 시든 부분을 다 잘라내시고 뿌리 쪽의 흙은 털어내지 않으셨다. 그렇게 뽑은 쪽파를 꽤 많이 비닐봉지에 담으시고는 나에게 주시며 집에 가서 베란다에서 키워서 먹으라고 하셨다. 뿌리에 흙이 붙어있는 채로 가지고 가서 심으면 잘 자라서 키워먹기 좋다는 것이었다. 나는 요즘 채소값이 금값인 데다 바로 먹는 것이 아니라 키워 먹는다는 재미도 있을 것 같아서 넙죽 쪽파를 받아왔다.
집에 와서 재활용쓰레기로 버리려고 했던 스트로품 상자에 쪽파를 심기로 했다. 상자의 바닥 부분에 물 배수를 위한 구멍을 몇 개 뚫고 상자 뚜껑은 물받이를 위한 받침대로 쓰기에 제격이었다. 쪽파를 흙이 붙어있는 채로 가지고 왔기 때문에 그대로 넣어주니 심기가 끝났다. 비 온 직후에 쪽파를 뽑았기 때문에 흙이 축축하여 물을 줄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쪽파 화분을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두었는데 밤에 기온이 떨어질 때 너무 추워서 죽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집에 있는 큰 비닐을 찾아서 기둥을 세워서 임시 비닐하우스를 만들어주었다. 쪽파 비닐하우스를 본 아이들은 쪽파를 키우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느냐며 놀라 했다.
쪽파 키우는 비닐하우스
나는 매일 쪽파가 잘 자라고 있는지 관찰했다. 3일 정도 지나자 쪽파의 길이가 처음 가져왔을 때보다 길어진 것이 눈이 띄었다. 남편에게 얘기하니 남편도 쪽파가 자란 것이 보인다며 미소 지으며 기뻐했다. 그러면서 아직도 남아있는 누런 잎들이 많이 보여서 남편과 함께 누런 잎들을 모두 떼어주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쪽파가 먹을 수 있는 길이로 자라면 오징어 파전을 해주겠다고 얘기했다. 아이들은 그 반찬을 좋아하기에 와~하고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설 명절을 보내느라 이틀 동안 집을 비우고 다시 와보니 쪽파는 2배 가까이 자라 있었다. 누런 잎들을 떼어준 것이 성장에 큰 도움이 된 듯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조금 있으면 부침개 해서 먹을 수 있겠다며 기대감을 주었다. 흙이 마르면 물을 주고 낮 동안은 햇빛이 강한 쪽으로 옮기고 밤에는 아예 집 안으로 들여놓기까지 하며 쪽파 키우는 것에 공을 들였다. 아들은 부침개 먹는 것을 기대하긴 했지만 쪽파가 자라는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아이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햇빛을 잘 받고 쪽파가 많이 자랐다
"쪽파를 먹으면 쪽파가 죽는 것 아니에요?"
"그렇지......"
"쪽파는 불쌍해요. 사람은 나빠요. 살아 있는 것을 먹고......"
"사람도 동물이야. 사람도 다른 동물처럼 살아있는 것을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
아이는 내 말을 이해는 했지만 속상하다는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드디어 먹을 반찬이 부족해지고 쪽파도 제법 많이 자란 날 내가 쪽파를 뽑아서 오징어 파전을 해주겠다고 했더니 어린 아들은 반찬을 먹을 우리의 입장이 아닌 쪽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한 것이었다. 아이의 누나는 오늘은 쪽파가 죽는 날이라는 동생의 말에 낄낄거리며 웃었고 나도 어이없었지만 아이는 나름 진지했던 것 같다.
아이가 태권도 학원에 간 사이 나는 저녁 반찬을 미리 만들어 놓으려고 계획했던 오징어 파전을 만들 준비를 했다. 쪽파 중 일부를 뽑아 다듬어서 다른 재료와 함께 버무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베란다로 나가서 쪽파를 뽑으려는 순간 아이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쪽파를 뽑으면 쪽파가 죽었다고 속상해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쪽파의 잎만 잘라내기도 좋지 않았다. 초록 잎만 잘라내면 누런 잎을 떼어 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자라 올라오겠지만 파의 뿌리 쪽에 있는 하얀 부분이 맛도 좋고 영양성분도 좋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중간을 선택하기로 했다. 뿌리에서 2cm 정도만 남겨놓고 가위로 잘라냈다. 이렇게 바짝 잘라내서는 쪽파가 다시 위로 자랄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아이의 마음과 음식의 영양가 둘 다 잡기 위한 나만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왼쪽사진은 잘라낸 쪽파이고 오른쪽 사진에서 쪽파 화분 안에 자르고 남아있는 파의 밑동이 보인다
태권도학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오징어 파전 다 만들어 놨다고 했더니 대뜸 '그럼 쪽파는 죽었겠네요.' 하면서 베란다로 뛰어갔다. 나는 아이를 쫓아가 "아니야, 쪽파 뽑지 않았어"라고 얘기하며 아이를 위로했다. 그런데 아이는 막상 바짝 잘리고 남은 파의 밑동을 보더니 "너무 많이 잘랐어요. 이렇게 짧게 자르면 다시 자라겠어요?"라고 나를 책망하듯 속상해하며 물었다. 아이의 말에 파를 너무 바짝 자른 나 자신에 대해 죄책감이 살짝 밀려왔지만 아이에게 희망의 말을 해주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뽑은 것보다는 낫잖아. 위로 다시 올라와서 자랄지 한 번 지켜보자."
쪽파를 키워보는 것이 처음이라서 짧게 잘려나간 파 밑동에서 파가 다시 자라 올라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기대해 본다. 잘려나간 파 밑동 위로 쪽파가 자라 올라오면 쪽파가 죽지 않고 살았다고 아이가 기뻐할 모습을 말이다.
쪽파를 자르고 난 후 쪽파가 자라 올라왔는지 댓글로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아래와 같이 사진을 올렸습니다 ^^
글을 처음 올린 날(2월 15일) 오후에 쪽파를 잘랐고 아래 사진은 오늘 아침(2월 17일)에 찍은 것이니 만 이틀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인데요, 쪽파가 자라 올라왔습니다. 아이도 쪽파가 죽은 것이 아니라며 좋아하더라고요 ^^
그런데 어머니께 여쭤보니 쪽파의 밑을 바짝 자르면 쪽파가 올라오긴 하는데 아주 얇게 올라와서 먹기에는 좋지 않다고 그냥 뿌리째 뽑아서 밑동까지 먹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
그래도 자라 올라오는 모습을 보니 좋더라고요, 아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인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