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율 Feb 22. 2024

열 일하는 달팽이 밥

달팽이는 가고 밥만 남았다 

작년 가을의 어느 주말 친정 부모님 댁에 갔다. 부모님의 밭에서 총각무를 뽑아와서 총각김치를 담가먹기 위해 어머니와 김치 거리를 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무를 다듬다 보니 무의 이파리 부분에서 달팽이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아이들이 보면 좋아할 것 같아서 아이들에게 여기 달팽이 있다고 소리치자, TV를 보고 있던 초등학생인 나의 두 아이들이 '우와'하고 소리 지르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나는 총각무 이파리 위에 달팽이 한 마리를  올려놓고 아이들에게 주며 달팽이를 관찰해 보라고 했다.


김치 거리를 계속 다듬고 있는데 이번엔 어머니께서 소리 치쳤다. "여기 달팽이 또 있다." 아이들은 '와'하며 신나게 달려와 달팽이 한 마디를 또 받아가지고 갔다. 김치 거리를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달팽이가 계속 발견되었다. 한 마리로 시작한 것이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로 되더니 김치 거리를 모두 다 다듬자 달팽이는 12마리나 되었다. 


아이들은 달팽이를 관찰하는데 온 신경을 쓰느라 이제 TV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아이들은 달팽이에게 총각무의 이파리를 먹이로 주면서 달팽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어른들한테 중계방송하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이 달팽이들을 집으로 가져가서 키우자고 했다. 

사실 우리 아이들은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키우자고 많이 졸랐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남편과 나는 허락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팽이를 키워보는 것은 크게 어려울 것도 없으면서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 그러자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달팽이를 가져갈 거면 달팽이 밥도 가져가야지!


그러시면서 손가락 크기만 한 새끼 배추를 여러 포기 주셨다. 그것은 조금 전 밭에서 총각무를 뽑을 때 한쪽 옆에서 어머니께서 속아오신 어린 조선배추였다. "이렇게 가지고 가면 다 시들지 않을까요?"라고 내가 물었더니 뿌리째 속은 배추이니 집에 가서 화분 한편에 심으면 살아날 것이라고 그러면 달팽이에게 계속 밥을 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어머니 말씀에 그 어린 배추들을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없었지만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렇게 달팽이와 달팽이 밥인 어린 조선배추를 들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어린 배추가 더 시들기 전에 화분의 한편에 심어주었다. 어린 배추의 일부는 당장 달팽이에게 줄 밥으로 남겨두었고 대략 15 포기 정도는 심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는 달팽이를 키울 수 있는 플라스틱 용기를 마련해 주었다. 마트에서 사 온 토마토가 들어있던 투명 플라스틱 용기를 씻어서 위에 구멍을 내고 바닥에는 달팽이가 살 수 있도록 흙도 깔아주고 달팽이 밥인 배추도 넣어주었다. 달팽이들이 더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기어가는 모습, 느리지만 천천히 배춧잎을 먹어서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구멍이 생기는 모습은 어른인 내가 봐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달팽이들이 여러 마리라서 먹이도 금세 소진되었다. 남아 있는 어린 배추로 먹이를 리필해 주자 다음에 줄 배추가 얼마 남지 않았다.


다행히 화분에 심은 조선배추는 처음에는 시들 거리다가 며칠 후 뿌리를 잘 내렸는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며칠만 더 지나면 잎을 따도 괜찮을 만큼 자랄 것 같았다. 사나흘이 지나고 드디어 화분에 심어둔 조선배추 잎을 수확하여 달팽이에게 주었다. 배추를 수확했다는 기쁨이 달팽이에게도 전달이 되었을까 달팽이가 배추를 먹는 모습이 더 씩씩해 보였다. 그렇게 달팽이도 달팽이 밥으로 가져온 배추도 잘 자라고 있었는데 부모님 댁을 방문하느라 집을 하루 비운 날 그만 일이 나고 말았다. 달팽이 집에 수분이 부족했던 탓인지 달팽이의 대부분이 죽어버린 것이다. 




아이들은 실망이 컸지만 아직 살아 있는 달팽이가 몇 마리 남았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하루 이틀이 지나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달팽이 밥인 조선 배추뿐이었다. 

달팽이는 모두 죽었지만 배추들은 처음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크고 싱싱하게 자랐다. 물만 주었을 뿐인데 처음 크기의 30배도 넘게 자란 것 같았다. 


비료를 주기 전 싱싱하게 자라던 조선배추들


그렇게 잘 자라는 배추를 보며 마음의 위안을 삼고 있던 어느 날 아이들이 베란다 한쪽에 있던 검정 비닐봉지를 가져와서 안에 있는 하얀 것이 무엇이냐고 내게 물었다. 봉지 안에는 하얀 알갱이들이 가득 들어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친정부모님께서 예전에 주셨던 비료였다. 아이들에게 비료에 대해서 설명하고 나자 배추에 비료를 주면 더 잘 자라겠다며 조선배추에 비료를 주자고 했다. 나 역시 좋은 생각이라며 조선배추 한 포기당 한 주먹 가량 되는 양의 비료를 듬뿍듬뿍 주었다. 이렇게 비료를 준 후 나중에 물을 주면 비료가 녹으면서 배추에게 영양분을 주는 것이라고 마치 비료 주는 법을 잘 아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설명까지 했다.


다음 날 비료를 주고 난 후 배추들의 발육상태를 보기 위해 아이들과 베란다로 갔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잘 자라라고 준 비료를 먹고 배추들이 모두 죽어버린 것이다. 그저 가만히만 뒀어도 잘 자랐을 배추에 괜히 비료를 잔뜩 주어서 죽여버리게 된 꼴이었다. 먹이를 줄 달팽이는 없었지만 매일 싱싱하고 푸르르게 잘 자라는 배추를 보며 즐거웠는데 내 손으로 다 죽인 셈이니 너무 속상했다. 어찌나 속상했던지 배추가 있었을 때의 기쁨이 그렇게 컸었는지 배추를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베란다에 있는 식물에 물을 주고 있었는데 베란다 한쪽 끝에 있는 화분에서 모르는 식물 하나가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하며 자세히 들여다보는 순간 그것이 조선배추 한 포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배추 한 포기가 살아남았다.

        혼자서 살아남은 배추 한 포기 -> 비빔밥 식재료가 되어준 배추 -> 현재의 배추 모습


처음에는 한 포기만 살아 있는 것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심어졌던 배추에 비료를 주다가 내 등 뒤에 있던, 베란다의 한쪽 구석에 있는 화분에 있는 배추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비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비료를 주지 못한 배추 한 포기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다.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더니 모두 놀라며 기뻐했다. 작은 배추 한 포기에 이렇게 기쁠 수가 있을까? 나는 유일하게 남은 배추 한 포기를 잘 키워보기로 했다. 꽤 많이 커서 잎을 따도 될 즈음에 남편이 배춧잎을 비빔밥에 상추처럼 넣어 먹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러자고 하며 배추를 뽑지 않고 상추의 잎을 따듯 가장자리 큰 잎만 몇 개 떼어내어 비빔밥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열흘 쯤 지나자 배추는 잎을 따내기 전의 크기로 돌아왔다. 너무 신기했다. 나는 가장자리 잎을 따서 또 비빔밥에 넣었다. 작은 배추 한 포기는 그렇게 다섯 번도 넘게 식재료로 사용되고도 아직도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다. 어린 조선배추를 화분에 옮겨 심은지 벌써 5개월이 다 되었는데도 말이다. 

이 작은 조선 배추 한 포기가 우리 가족에게 정말 많은 일을 했다. 화분에 처음 옮겨진 후 잘 자라는 모습을 보이며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고 달팽이가 살아 있을 때 달팽이에게 먹이가 되어 주었다. 다른 모든 배추들이 죽었을 때 홀로 살아남아 우리가 겪었던 상실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 대신 더 큰 기쁨을 주었다. 다섯 번이나 우리의 비빔밥 재료가 되어 우리에게 영양분을 주었고 지금도 변함없이 싱싱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며 심지어는 내 브런치 스토리 글의 글감이 되어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열 일 하고 있는 배추 한 포기에게 수고 많이 했다고 비료는 주지 않겠다.

이전 02화 율마냄새 가지고 왔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