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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스랑 Feb 09. 2023

무지의 슬픔

알랭 드 보통, 유명한 사람이라 그가 쓴 책을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 일단 제목이 멋있다. 슬픔이 주는 기쁨이라니, 고통의 문제를 다룬 시에스 루이스가 생각났다. 책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화가 호퍼의 그림이 슬프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는 첫 문장. 호퍼의 그림을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그림을 함께 실어주었으면 도움이 되었겠지만 글자뿐이다. 그림에 대해 궁금증은 일으켰지만 글은 공감이 되지 않았다. 슬플 때 우리를 잘 위로해 주는 것이 슬픈 책이듯 우리가 쓸쓸할 때 벽에 걸어야 할 게 호퍼의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일 수 있다는 거다. 그림이 주는 위로가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호퍼의 그림을 모르니 갑갑하다.  

무심한 정서로 즐거움 없이 숙제하듯 책장을 넘겼다. 내 뇌가 문제인지, 내 수준이 작가를 못 따라가는지, 별 재미가 없다.  모르는 호퍼를 계속 읽어야 하나, 그러면서 계속 읽는 내가 우스꽝스럽다. 따라 하고 싶은 문장도 눈에 띄지만 필사를 할까 하다 그만둔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독서시간. 2시간 집중해 읽으면 될 수필집을 지루하게 읽어야 하는가 고민하다, 그냥 마저 읽기로 했다. 그냥, 읽자, 읽어. 그렇게 뒷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수 배웠다. 글쓰기(와 송어)에 대한 부분에서 아! 하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 책을 도저히 읽어줄 수가 없는 이유는 저자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송어와 날씨 이야기가 나오는 등 사실들이 열거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그림에서 삶은 빠져나가고 보이지 않는다. 마치 사람의 발과 구름만 나오는 홈 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 관객은 어리벙벙하여 도대체 눈높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증을 느끼게 된다.

많은 글쓰기가 그런 식이다. 맞춤법은 시간이 가면 정확해지지만, 우리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도록 단어들을 배열하는 데는 꽤 고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보통 글로 쓴 이야기는 사건의 거죽만 훑고 지나간다. 석양을 본 뒤, 나중에 일기를 쓸 때는 뭔가 적당한 것을 더듬더듬 찾아보다가 그냥 '아름다웠다'고만 적는다. 우리는 사실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글로 고정시킬 수가 없어 곧 잊고 만다. 우리는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붙들어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어디에 갔고 무엇을 보았는지 목록을 작성한다. 그러나 다 적고 펜을 내려놓을 때면 우리가 묘사하지 못한 것, 덧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사라져 버린 것이 하루의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삶을 붙잡아두는 데는 감각 경험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가 보는 것을 나열한 자료는 예술이 되지 못한다. 오직 선별을 할 때에만, 선택과 생각이 적용될 때에만 사물들이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읽다 보면 역설적으로 나 혼자 파악하려고 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의 책에 있는 말을 읽다 보면 전보다 더 생생한 느낌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세계는 어떠한지를 돌아보게 된다. 예를 들면 젊은 시절 짝사랑이 무엇인지 나에게 가르쳐준 사람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이고, 정치가나 광고업자의 헛배운 어리석음을 보게 해 준 사람은 플로베르의 오메이다. 내가 질투심에 무너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프루스트의 고통스러운 구절들 덕분이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책을 내려놓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작가가 우리와 함께 있다면 반응을 보였을 만한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정신은 새로 조율된 레이더처럼 의식을 떠다니는 어떤 대상들을 포착한다.      

                                                                                           슬픔이 주는 기쁨 113~117 페이지


맞다. 이 글을 읽고  내 일기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삶에서  진짜 포착하고 싶은 것을 쓰고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책을 내려놓고 내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의 말이 나를 따라다녔다. 

 '오늘 나는 건강을 위해 달달한 라테 커피 대신 쓰디쓴 강황차를 마셨다.' 대신 이렇게 일기를 쓰기로 했다. 

"인생은 쓰다, 써!"

그렇게 외친 후  강황차를 마신다. 강황가루 3-4g을 뜨거운 물에 타서, 설탕도 꿀도 그 어떤 달콤한 것도 첨가하지 않고 마신다. 너무하다 싶을만큼 쓰다. 마시고 싶지 않다. 인생이 쓰다고 외치는 건 쓴 맛을 참고 견디기 위한 주문이다. 샛노랗게 진한 강황이 입안을 강타하고 나면 뒤끝이 남는다. 첨가물이 들어간 차는 마실 때는 좋지만 마지막엔 개운치 않은 역한 맛이 올라와 괜히 마셨다는 후회가 따라온다. 반면 강황차는 쓴 맛 끝에 묘하게 단맛이 있는 것 같다. 그 맛에 속아 어딘가 달콤함이 있나 싶어 잠깐 치아와 입천장을 혀로 구석구석 돌려본다. 역시 쓰다, 써. 또 잠깐 시간이 흐른다. 이윽고 침샘에서 침이 나오면 그 쓴맛은 뭔지 모를 단맛으로 다시 둔갑한다. 내 인생의 모든 쓴 물이 마지막에는 단물로 느껴지는 그 한순간이 온다면 오늘을 견디리라.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 강황차를 마시며 슬픔이 주는 기쁨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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