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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넘은 정형외과 전문의의 육군훈련소 입소기

고향을 떠나 시작된 3년의 여정, 그 첫걸음

by 의사과학자 류박사 Jan 3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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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 넘어, 처음 떠나는 고향 】


병무청 역종분류 발표 결과, 저는 병역판정전담의사로 분류되었고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입소를 며칠 앞두고 마음이 싱숭생숭했습니다. 훈련이 힘들 것이란 걱정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고향 대구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지역의료의 한 축을 담당하는 모교 대학병원에서 전공의 수련까지 마치는 동안 단 한 번도 부모님 곁을 떠나본 적이 없었기에, 집을 떠나 3년이 넘는 국방의 의무를 시작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90%가 넘는 확률로 고향이 아닌 다른 지역 병무청으로 배치될 상황이었습니다. 전공의 시절에도 당직 때문에 집에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직장 근처에 집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가 있을 곳을 스스로 정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것이 제 마음을 더욱 싱숭생숭하게 만들었습니다.



【 입대 전날, 이발소에서 】


육군훈련소 입소 날짜는 병무청 역종분류와 함께 갑자기 정해졌습니다. 마침 부모님께서 여행 일정이 있으셔서 입소 며칠 전부터 저는 집에 혼자 지내고 있었습니다. 불가피하게 훈련소 입소를 혼자 하게 되었습니다. 입소 전날, 평소에는 잘 가지 않던 남성전문 이발소를 찾았습니다. "선생님, 저 내일 입대합니다. 머리를 짧게 깎아주세요"라고 말씀드리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이발사 분도 아마 90% 이상의 확률로 군복무를 마치신 분이었기에, 몇 cm로 잘라야 하는지 따로 묻지 않고 바로 이발을 시작하셨습니다.


머리가 짧게 잘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이후 처음으로, 무려 12년 만에 이렇게 짧은 머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바뀐 외모에 따라 마음가짐도 많이 달라진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래, 이제는 인생 2막이 시작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의사의 군복무, 그때와 지금 】


30대가 넘어 사회생활도 몇 년 경험한 제가 가는 군복무의 길은 20대 초반의 현역 입대보다 육체적으로는 수월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역 군인의 복무 기간이 1년 6개월인 데 비해, 의무사관후보생은 3년 1~2개월을 복무해야 합니다. 3년이란 시간은 누군가에겐 짧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무척 길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최근 의과대학 학생들 사이에서 현역 입대를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관성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의과대학에 입학하면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군복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람은 관계지향적이라, 만약 당시 또래 친구들이 현역 입대를 많이 했다면 저도 자연스럽게 그 길을 따라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변의 친구들과 선배들 대부분이 의무사관후보생의 길을 선택했기에, 저 역시 그것이 당연한 선택처럼 여겨졌습니다.


2018년 제가 입대할 당시와 2025년 현재를 비교해 보면, 가장 큰 변화는 사병 월급이 2배 이상 증가한 반면, 다른 형태의 군복무 급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군의관과 공중보건의 등 의사의 군복무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의 변화와 이러한 급여 체계의 변화가 현재 의과대학 학생들의 현역 입대 증가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 마지막 맥주 한 캔 】


논산 육군훈련소 입소일 아침, 창밖에 내린 폭설을 보고 걱정이 앞섰습니다. 짐을 싸고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시내버스가 정상 운행을 하지 않아 동대구역까지 가는 길이 험난했습니다. (사진 1) 도착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출발했음에도 계속 지연되어, 입소 시간에 늦을까 봐 마음을 졸이며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전날 미리 찾아본 논산 육군훈련소 가는 길은 이미 많은 선배 입소자들이 상세히 안내해 놓은 덕분에 쉽게 숙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대전역에서 대전복합터미널로 이동한 뒤 버스를 타고 연무대로 향했습니다. 연무대 버스터미널에서는 택시 기사님들이 짧은 머리의 청년들을 보면 목적지를 묻지도 않고 합승을 제안했습니다. 택시의 미터기는 의미 없이 흥정된 가격으로, 여러 명이 한꺼번에 훈련소로 향했습니다.


택시를 타기 전,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마시는 저보다 10살은 어려 보이는 청년이 눈에 띄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저기서 맥주를 마실까' 했는데, 입소 첫날이 끝나갈 무렵 그 광경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마시지 못한 마지막 맥주 한 캔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사진 1. 폭설로 하얗게 변한 대구 범어네거리. 입소 시간에 늦을까 조마조마했던 순간.



【 훈련소에서 맺어진 특별한 인연들 】


논산에 위치한 육군훈련소의 첫 느낌은 정말 넓은 부지에 위치한 곳이라는 것과 웅장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진 2) 이런 웅장한 느낌과 상반되게 입소자들의 표정은 사뭇 어두운 편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날씨까지 흐리고 폭설이 와서 웅장함과 어두움이 대비되었습니다.


훈련소에 입소한 모든 인원이 강당에 모여 신분확인을 마치고 중대 배치를 받았습니다. 저는 같은 병역판정전담의사로 분류된 수십 명과 한 중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이어서 4주간 동고동락할 분대 배정이 이뤄졌고, 전문의 열한 명이 한 방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분대의 구성은 다양했습니다. 네 명은 광주・전남 지역 수련병원 출신이었고, 대부분은 대구・경북 지역 수련병원에서 왔으며, 두 명은 경기도 소재 수련병원 출신이었습니다.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박수를 치며 인사를 나누었는데, 이런 경험은 대학 시절 이후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훈련소 동기들과는 정말 빠르게 친해졌고, 퇴소 후에도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제 삶에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인맥이 대학과 수련병원 동기들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제 훈련소 동기들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가 더해졌습니다.


사진 2. 호국요람, 논산 육군훈련소. 수많은 청년들의 새로운 시작점.



【 정형외과 의사가 알려주는 훈련소 필수품 】


훈련소 입소 이후 5년이 지난 지금, 만약 다시 입소한다면 무엇을 챙겨갔으면 좋았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현재는 많이 달라졌을 수 있지만,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몇 가지 필수품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릎과 팔꿈치 보호대입니다. 훈련 중 땅에 엎드리는 일이 잦았는데, 정형외과 전문의로서 환자들에게 늘 관절 보호를 강조하면서 정작 제 관절 건강은 소홀히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또한 주말 휴식 시간을 위한 긴 책 한 권도 추천합니다. 저는 미래를 고민하며 읽을 만한 책들을 여러 권 가져갔고, 주말마다 틈틈이 읽었던 기억이 좋았습니다.


그 외의 물품들은 크게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훈련소에서는 입소와 동시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정확한 수량으로 지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속옷, 내복, 치약, 칫솔, 비누, 심지어 손톱깎이까지 지급되는 것을 보고 '이런 것까지 준다고?' 하며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게다가 처음 분대 배치를 받고 생활관까지 가는 길이 깜짝 놀랄 정도로 멀기 때문에, 불필요한 짐은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른이 넘어 시작된 저의 군대체복무 생활은, 걱정과 설렘이 뒤섞인 채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A journey of a thousand miles begins with a single step”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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