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년 차 회식이 있는 날이다. 저 연차끼리 모여서 술을 마시며 서로 얼굴도 익히고 친분을 쌓는 회사 전통 회식이다. 주말에 쇼핑을 했다. 이 날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집 안 옷장을 아무리 뒤져봐도 대학생 때 주로 입던 청바지, 맨투맨, 후드티, 아니면 좀 멋 낼 때 입던 미니스커트 정도가 다였다. 물론 회사 입사 전 정장바지 몇 벌과 셔츠 등을 샀지만 그걸 입고 가기에는 또 너무 딱딱해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폭풍 인터넷 서치를 끝낸 결과 너무 정장 느낌은 안나는 캐주얼핏의 슬랙스와 꽃무늬가 그려진 블라우스, 그리고 코트로 마무리를 했다.
회식 장소는 기숙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깃집이었다. 도착하니 이미 삼삼오오 모여서 반갑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도 있고 서로 어색한 미소만 띠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어색한 미소로 화답을 하며 비어있는 구석자리 중 하나에 착석했다. 선배 중 한 명이 있다가 자리 섞어 앉을 거니 일단은 비어있는 곳에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사실 여기가 기억 왜곡이 있는 부분인데, 자리를 임의로 섞어서 배정을 했는지 제비 뽑기로 결정을 했었는지가 기억이 안 난다.) 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 선배, 앞에는 동기가 나란히 자리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런 자리를 매우 불편해한다. I 성향인 나로서는 다수의 모임보다는 늘 소수의 모임을 선호해 왔다. 4명까지 정도가 Max이다. 소수의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있을 때는 대화도 잘하고 많이 웃지만 다수가 모여있을 때, 또 그 다수가 처음 보거나 어색한 사이일 경우에는 정말 고역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사회화된 동물. 인간이 아니던가. 입가에 억지미소를 딱 장착하고 평소보다 한음 더 높은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떻게 보면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될 수도 있는 1,2년 선배들이기에 그들에게 나쁜 인상을 심어줘서는 안 된다. 너무 활발하지도 너무 소심하지도 않은 딱 중간. 눈에 띄지 않는 포지션이 중요하다.
고기가 나오고 굽기 시작한다. 누가 고기를 굽는가도 상당히 중요한 눈치싸움이다. 처음부터 고기를 굽겠다고 나서게 되면 너무 나대는(?) 혹은 잘 보이자고 하는 의지가 강해 보이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중간쯤 적당한 타이밍에 '이제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치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그렇게 수많은 생각을 하는 중 휴대폰이 자꾸 울렸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다. 역시나 남자친구다.
연애 6년 차에 접어든 장기연애를 하면서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특히나 각자 위치에 따른 관계 변화가 컸다. 연애를 시작한 처음 우리는 휴학생-휴학생의 관계였다. 그리고 6개월 뒤 남자친구가 입대를 하면서 휴학생-군인의 관계를 거쳐 내가 복학 후 대학생-군인의 관계, 남자친구 전역 후에는 대학생-대학생, 그리고 대학생-취준생의 관계에서 직장인-취준생의 관계로 변화가 일어났다. 매 순간 관계와 위치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갈등이 있어왔다. 각자가 놓인 위치에서의 시각에 따른 이해관계가 달랐기 때문에. 지금의 '직장인-취준생' 관계 구도는 서로 겪은 지 한 달밖에 안되었기에 새로운 갈등에 맞닥뜨린 상황이었다. 남자친구는 이렇게까지나 날 사랑해 줄 수가 있구나를 알려준 너무나 감사한 사람이었지만 집착과 구속이 있는 편이었다. 같은 휴학생이거나 대학생일 때는 그 강도가 약했지만 군인이었을 때나, 취준생일 때는 좀 더 심해졌다. 대학생일때도 과 MT나 동아리 MT는 못 가게 했었고(물론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어주는 스타일이 절대 아니었기에 나는 끝까지 내 주장을 관철시켜 MT를 갔다.) 친한 친구들끼리의 술자리도 굉장히 싫어했다. 그랬기에 당연히 오늘 있는 이 자리도 매우 예의주시 중일 거다. 계속 울려대는 휴대폰이 신경 쓰였지만 나는 지금 내 사회생활에 집중해야 한다.
친화력이 좋은 동기 몇몇은 벌써 선배들과 장난을 치며 친해진 게 보인다. 그런 사람을 볼 때면 내 마음 한구석엔 늘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자괴감이 자라났다. 나는 그저 이 자리 저 자리 돌아다니며 어색한 입꼬리를 올릴 뿐인데.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란 생각에 머릿속이 괴롭다. 새로운 테이블로 가 만난 여자선배 중 한 명이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신입사원 중에 엄청 이쁜 사람 있다고 소문났던데. 근데 그 동기 보다 본인이 더 이쁜 것 같은데?"
너무나 당황스럽다. 이건 대답을 하라고 던진 질문이 아닌 걸 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그것도 이상하고. 그냥 나는 하하하하 누가 봐도 겸연쩍은 웃음을 흘린다. 선배는 그저 힐끔 다른 테이블에 있는 여자동기를 쳐다보고 날 보며 그 말을 던졌을 뿐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큰 소용돌이가 인다.
'도대체 저 말을 던진 의도가 뭘까?"
'아니죠. 저 동기가 당연히 더 예쁘죠라고 대답했어야 했나.'
'아니면, 에이 선배님이 제일 예쁘시죠가 정답이었나.'
수많은 고민 끝에 도출된 결론은 무슨 대답을 했어도 기억도 못할 것 같다는 거다. 저 선배는 어떤 대답을 위해서 던진 말이 아닌 것 같다. 나만 아직도 그 질문 속에 파묻혀 그 저의를 따지고 있지 저 해맑게 웃으며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선배를 보자니 그녀는 그저 정말 스쳐 지나가는 말로 말을 던진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그 생각이 든 건 나는 당연히 '엄청 이쁜 사람보다 이쁜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거다.
아무튼 이렇게 또 고난의 회식이 저물었다. 일차, 이차, 삼차 내내 따라다니면서 나는 지칠 대로 지쳤지만 먼저 집에 간다고 내지를 수 있는 용기 있는 인간도 아니었다는 것에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