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간 마케팅일을 하면서 이런 질문을 수도 없이 많이 받아봤다. 대체로 마케팅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마케팅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순진함'을 가장한 질문들이었지만, 들을 때마다 기운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질문을 던지는 대상이 조직의 리더라거나, 헤드였들때는 무기력함을 넘어 절망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대체 어떻게 저 자리에 앉아있는 거지?
어떤 일이든 혼자 해서 되는 일은 없다.
결과에 좀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한 개인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떤 조직의 일도 100% 한 명이 해결해내는 상황은 잘 벌어지지 않는다. 헤드가, 고용주가, 에이전시가 각자 맡은 일이 있고, 모든 사람이 제 자리에서 역할을 충실히 할 때 '업무'라는 프로세스가 유기적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대체로 소위 말하는 '갑'의 역할을 해왔었음에도, '대행사'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단어에는 묘하게 수동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업무들은 에이전시만큼의 경험과 전문성을 쌓기 힘든 경우들도 많다. 그때 '갑'이 받아야 하는 도움은 대행업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지 못한 문제 해결 능력이었다.
나무를 심는 사람도 있고, 숲을 조성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거름을 뿌리고 물을 주겠지만 크게는 이 숲을 조성할 것인가 말 것인가, 조성한다면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를 정하는 사람도 있다. 일의 경중이나 크기를 논하기보단, 역할의 차이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할 것이다. 거름 뿌리기를 함께 도와주지 않았다고 해서, 숲 조성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해서 서로의 기능을 폄하할 수 없다. 모쪼록 서로가 맡은 바를 잘 해낼 것이라고 믿고 현재 내가 맡은 일을 잘 해내는 수밖에.
"그거 팀장님이 하신 것도 아닌데 뭐가 감사해요?"
마케팅팀 팀장으로 일할 때였다. 새롭게 시도했던 마케팅 캠페인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찾아낸 방법들이 새롭다는 평가를 얻어 팀은 고무적이었다. 그 작은 시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의견을 내려 분투했는가. 한 현장에서 만난 헤드급 기자가 반갑게 말을 건넸다.
"이번에 마케팅 반응 너무 좋던데요?"
기분 좋게 분위기를 열어주는 아이스브레이킹이었을 터. 즐겁게 화답했다.
"다 같이 고민 많이 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에요. 좋은 말씀 감사해요."
"팀장님이 뭐가 감사해요? 어차피 그거 팀장님이 하신 것도 아닌데. 그거 다 대행사에서 만든 거잖아요~"
황당했다. 헤드급의 경력을 쌓은 기자라는 사람조차 하나의 캠페인이 대중을 만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 나 역시 기자라는 직업의 업무를 속속들이 아는 것은 아니니 무지는 그렇다 쳐도, 앞에 앉은 사람의 역할을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이나 얹으려는 파렴치한 기능쯤으로 치부하는 무례함. 그 안에는 소위 '갑'사에 대한 비아냥과 냉소가 담겨있었다. 웃긴 건 이런 뉘앙스의 동료들을 내, 외부에서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마케팅의 기능이 지나치게 세분화되어있고, 작은 점조직들이 협업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업계의 관행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마케터의 기능과 한계에 대한 고민
모든 마케터들이 어느 정도 경력을 쌓고 나면 유사한 고민에 빠진다. '결국 마케팅은 곁가지의 역할에 머무르는 것은 아닐까?', '핵심적인 업무를 하는 의사결정자가 되려면 마케터라는 딱지를 버려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찾은 답은 '절대 아니다'이다.
어떤 대표에게도, 비즈니스맨에게도 마케팅은 필요한 기술이고 실력이다. 시장과 소비자를 이해하고 연결하는 반드시 필요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즈니스맨으로서 롱런하기 위해 갖춰야 하는 실력은 비단 마케팅뿐 아니라, 상품, 유통, 데이터 등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일 것이다. 폭넓은 이해와 실력을 갖춘 헤드들은 상품기획과 시장조사 단계부터 이미 마케팅적인 사고와 마인드가 확고하게 잡혀있다.
마케팅이 단순히 SNS에 광고를 세팅하고, 결과값을 분석하는 일뿐 아니라, 결국은 '논리적인 문제 파악과 솔루션을 찾아내는 사고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서두에 언급했던 질문들을 던지지는 못할 것이다.
'마케팅 그거 다 에이전시가 해주는 거 아니냐', '어차피 그거 팀장님이 하신 것도 아닌데 뭐가 감사해요?'라는 질문들은 나에게 비즈니스맨으로서 상대방의 수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야기들에 불과했다. 대체 마케팅을 뭐라고 생각하기에? 그 그릇에 함께 머물 것인가, 반면교사 삼을 것인가는 내 몫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