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빌리시를 바라보며
조지아 여행기를 연재 중입니다
8. 삶이 그대를 속일 때 하맘 (Hammam)으로 가자
9. 올드 트빌리시에는 낭만과 NONONO패밀리가 있다.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별다른 생각은 없었고 그저 눈앞에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해가 지고 트빌리시에 야경이 내려앉았다.
그 밖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
해외여행 경험이 많지 않은 나다.
그런 내가 1500년도 더된 고성 위에 앉아 있었다.
낯선 이국의 풍경 앞에 누구에게도 방해하지 않는 나만의 고요한 시간.
그 시간은 이후에도 종종 내 삶을 환기시키는 포인트가 되어 주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신 로봇처럼 교사에서 엄마로, 엄마에서 딸로, 딸에서 주부로, 혹은 아내로 역할을 체인지하며 살았다.
나를 돌볼 시간은 늘 부족했고, 부족함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바빴다.
그러다 이유 모를 공허함에 눈물이 나는 날도 더러 있었다.
그곳은 주변머리 없는 내가 스스로 절대 오지 못했을 낯선 나라 조지아였다.
여행 메이트들의 이끌림 덕에 그날 나는 이국의 오래된 성곽 위에 올라앉아있었다.
고즈넉한 그 시간동안 그저 멍하니 생각을 비웠다.
비워낸 곳에 새로운 에너지를 채워졌다.
나리칼리 요새까지 아바노투바니 Orbeliani 또는 고르가살리 광장 Vakhtang Gorgasali Square 쪽에서 걸어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은 케이블카를 이용한다.
편도 요금은 4.5라리 (약 2,250원, 내가 방문했던 19년에는 절반 가격이었는데 두 배가 상승했다).
우리는 조지아를 렌터카로 여행했기에 교통카드는 필요 없었지만 기념 삼아 하나씩 구매했다. 이 카드로 버스, 지하철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거리와 상관없이 요금은 1라리(약 500원)로 저렴하다.
쿠라강변 탑승장 (Aerial Tramway, 1 დუტუ მეგრელის ქუჩა, Tbilisi, 조지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오면 조지아 어머니상을 먼저 만날 수 있다.
그녀는 한 손에 와인을, 한 손에 칼을 들고 있다.
트빌리시가 수도가 된 지 1,500년이 되던 1958년에 건설된 것이라고 한다.
친구에게는 와인을, 적에게는 칼로 맞서겠다는 의지로 그녀는 트빌리시를 지키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한눈 팔지 않고 오롯이 트빌리시만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에 관광객에는 뒷모습과 옆모습만 보인다.
꽤 가파른 계단을 한참 내려가면 정면 모습도 가능하지만 우린 생략했다.
조지아 어머니상에서 나리칼리 요새로 걸어서 이동한다.
길을 잘못 들어서서 돌아 돌아 도착했다.
분명 사람들이 오간 흔적이 있었는데 가보니 막다른 길이었다.
없던 길도 개척해 가며 나리칼리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나리칼리성은 4세기에 축조된 유서깊은 유적이다.
17세기까지 건재하다가 1827년 지진으로 붕괴된 것을 1996년 복원해서 현재에 이른다.
트빌리시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보니 늘 관광객에게 사랑받는 장소다.
나도 그곳이 참 좋았다.
천년을 훌쩍 넘는 시간을 머금은 기운 덕분인지 참 포근한 곳이었다.
해질녘 쯤 도착해서 완전히 해가 넘어가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무너진 성곽에 앉아 있었다.
멍하니 앉아서 생각을 비우고, 비워낸 그곳에 새로운 에너지를 채웠다.
여적도 난 그날의 에너지를 조금씩 끄내 쓴다.
지금도 바쁜 일상 중 문뜩 눈감고 나리칼리 요새에 걸터앉아 있던 그때를 생각한다.
조금 쌀쌀했고 바람이 차가웠지만 속이 뻥 뚫리게 시원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답답했던 일상에 그날의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조지아는 나에게 시원한 바람 한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