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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Mar 10. 2024

한 달 만에 5kg이 빠졌다.

호르몬의 공격

27살의 나는 겨울의 차가운 공기와 봄의 따스한 공기가 하늘 어딘가에서 만나 스리슬쩍 인수인계 하는 동안  이 계절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들 헷갈려하는 어중간한 그 어딘가에 있었다. 매섭게 차갑지도, 데일 것 같이 뜨겁지도, 따뜻하지도, 포근하지도 않은 이도 저도 아닌 어딘가였다. 


그때 나는 60세가 되면 죽는 것이 꿈이었다. 평균수명이 100세를 넘어 120세라는 말이 나오는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아마도, 나이가 많은 부모님이 힘들게 가계를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며 커온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27살일 때 엄마가 67세, 아빠가 68세였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생계를 위해 일을 하며 힘들어하는 모습은 나에게 편하게 노후를 즐기며 사는 삶을 꿈꾸지 못하게 했다. 나에게 펼쳐질 미래도 직장생활을 하며 받은 월급으로 한 달, 한 달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일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와중에도 저축하며 노후를 준비하는 부모님을 보며 지금 맛있는 거 안 먹고, 하고 싶은 거 안 하며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을 어리석다 생각했다. 나는 하고 싶은 거 하고, 먹고 싶은 거 먹고, 한 달 월급을 받으면 다음 달 월급이 나오기 전에 다 쓰고, 다음 달 월급으로 또 그 달을 살아가는 삶을 꿈꿨다. 그래서 나에게는 노후라는 건 없었다. 그렇게 살다 60세가 되면 죽는 게 목표였다. 아직은 주름이 덜 진 얼굴과 쪼글쪼글해지지 않은 손과 굽지 않은 등으로 내 삶을 멋지게 마무리하는 것이 꿈이었다. 27살의 나는 치기에 어려있었다. 그런 생각에 취해 매일 술을 마시고, 새벽까지 친구들과 놀며 시간을 보냈다. 


무척 더운 여름이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과 냉방이 잘 되지 않는 사무실은 너무 숨이 막혔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턱 막혔고 심장은 가슴 밖으로 튀어 나갈 듯이 뛰어댔다. 계단 한 층을 오르는 것도 힘들어 반층을 오르면 계단 손잡이를 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쉬어야 했다. 


가만히 있어도 식은땀이 흘렀다. 갈아입을 옷을 갖고 다니며 땀이 많이 날 때는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

 그리고, 손이 떨렸다. 물컵을 쥐거나, 필기구를 쥐거나, 젓가락을 쥐면 사정없이 떨리는 손때문에 손 떠는 모습을 본 주변에서는 술 좀 그만 먹으라며 온갖 타박을 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술도 끊었다. 그런데도 손떨림은 없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자도 자도 피로감이 없어지지 않았다. 어느 주말에는 17시간을 내리 잤다. 엄마는 밥도 안 먹고, 화장실도 가지 않고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 딸이 죽은 줄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도 피로감은 없어지지 않았다. 두 눈을 뜨고 있는 게 힘들었고, 걷는 게 힘들었다. 어르신들이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시는 걸 돕다보면 '아.. 저기에 내가 앉고 싶다.'마음이 가득 찼다. 



 중, 고등학교 체육시간 말고는 내 몸을 의지대로 움직여하는 운동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운동을 하지 않아 점점 저질체력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름만 지나면 운동을 시작할 테다.라는 굳은 결심을 하며 여름을 헉헉대며 지나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직원들 뿐만 아니라 복지관에 오는 많은 분들이

 "정선생, 살이 많이 빠졌네.",

 "어머, 다이어트 중이세요? 효과 좋은데요?"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살이 빠지고 있었나? 너무 좋은데?'라는 생각에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울 속 내 얼굴은 내가 아니었다. 안구와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고, 얼굴에는 살이라는 게 보이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옷도 너무 커져서 벨트를 하거나 새로 사야 했었다. '살이 많이 빠지긴 했네. 체중을 재어야 봐야겠다' 그렇게 한 달 만에 올라간 체중계는 한 달 전보다 5kg이 빠진 숫자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맘 때쯤엔 지금처럼 매일을 다이어트와 사투를 벌이던 시기는 아니었다. 젊음이 무기였는지, 밤늦게 야식을 매일 먹어도 살이 많이 찌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인이 된 이후 처음 본 숫자. 43kg이었다. '우와~. 이런 날이 다 있네.'라는 기쁜 마음이 들었다. 남들은 죽어라 약 먹고, 운동하고, 식단 조절하며 뺀다는 살이 나는 그냥 막 훅훅 빠지니 뭔가 우월감도 느껴졌다. 그때의 그 환희는 지금도 몸에서 기억한다. 다시 느껴보고 싶은 환희의 감정. 아, 물론 건강하게 빼서.

체중이 줄고 몸이 말라가자 얼굴은 더 말이 아니었다. 까만 긴 생머리에 뱅헤어를 고수하던 나를 보는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봐도 저 멀리 피라미드 속 깊은 곳에 묻혀 있다 나온 미라 같은 느낌이 들어 숏펌을 했다. 가뜩이나 마른 얼굴에 햇빛에 그을려 까매진 얼굴에 뽀글거리는 짧은 머리는 국적을 의심하게 만들어버렸다. 뭐. 그래도 새로운 변화가 꽤 맘에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2~3달이 지날 즈음,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엄마의 불호령에 한의원으로 끌려갔다. 진맥 결과 몸에 기가 하나도 없고, 뭐가 바닥이라고 했는데 기억은 안 난다. 아무튼 몸 상태로는 당장 입원해야 할 상황이니 '용'을 넣은 한약을 먹자고 했다. 하아.. 초등학교 때 생리통 때문에 고생하는 딸을 위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비싼 돈 주고 엄마가 지어줬던 한약을 책상 서랍 곳곳에 숨겨놓고, 문제집 사이에 끼워놓으며 안 먹기 위해 발버둥 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옛 기억에 허우적거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내 이름으로 된 약탕기에 온갖 약재들이 한 곳에 모여들며 자신들을 희생하고 있었다. 그래, 잘 먹어보자. 그렇게 2달을 꼬박 한약을 먹었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몸이 너무 힘들어 퇴사까지 고민하던 어느 날, 복지관에 함께 근무하던 간호사 선생님이 갑자기 내 목을 보더니 "정선생님, 갑상선 이상 같은데? 목이 많이 부었어." 


그 말이 나를 살렸다. 


급하게 예약한 대학병원 내분비내과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갑상선기능항진증'이라는 진단명을 내려주었다.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약을 먹어서 호전되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약 2년 동안 갑상선 치료가 진행되었다. 다행히 약물치료만으로도 호전되어 다시 살이 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이 사라졌으며, 손떨림도 없어졌다. 커졌던 갑상선은 금방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육안으로는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그 뒤로도 5년 이상을 정기검진을 받았다. 갑상선기능항진증을 앓으며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60세가 되면 죽기로 했던 생각을 80세로 수정했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하고 싶은 많은 일을 하지 못하며 무기력하게 버텨야 했던 몇 달은 내가 해보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아픔은 견뎌야 하는 것일까? 묵묵히 견디다 보면 어느 순간 괜찮아질까? 아픔은 치료해야 하는 것일까? 아픔은 공유해야 하는 것일까? 아픔은 혼자 버텨야 하는 것일까? 마음의 상처와 몸의 상처는 같은 법칙이 적용될까? 아픔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 아픔의 정도도 사람마다 다르며, 느껴지는 것도 다르다. 아픔에 대한 태도도 사람마다 다르다. 나에게 아픔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아픔은 담금질을 통해 조금 더 견뎌내고, 버텨내며 승화시키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함께 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 사람들이 느끼고, 갖고 있는 아픔이 아픔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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