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23일 편지

by 오후세시



수지에게
수지의 아주 재미있는 편지를 즐겁게 보았단다. 시험을 그렇게 잘 쳤니. 수지가 공부도 아주 잘하는가 보다. 예전에는 상장도 많이 탔는데 공부를 잘해서였구나.
수지도 머지않아 중학생이 되겠구나. 그러니 지금까지는 어린이였는데 지금부턴 학생이라고 해야 하는구나. 중학생이 되면 더 열심히 노력하여하고 싶은 인물이 되야겠다.
그러고 수지가 한참 추억에 잠겨있었다고! 옛 앨범을 보고 여러 가지 모습의 변화도 느껴봤구나. 옛 추억이 귀중한 것이란다. 수지가 보내준 2장에 사진은 다음 올 때 줄 테니 잘 간직하고 있어라.
이제 방학도 했으니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서울에 와서 며칠 쉬어야겠구나. 수지가 올 날을 기다리겠다. 긴 방학 동안 엄마도 도와드리고 협의의 공부도 지도해주어야 된다. 너희 집에서 장자 아니냐.
날씨가 풀리면 서울에 오너라 할머니가 맛있는 음식도 해줄 것이다.

그럼 안녕
12월 23일


어느새 중학교를 앞두고 있던 나에게 할아버지는 '학생'이라는 새 칭호를 따다 붙였다. 편지에도 "수지 학생에게"라고 적어넣으셨다. 그 시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공부보다 친구였고, 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성적표와 같은 결과들이 어린 나이에 괴로웠다. 친한 친구는 내 마음과 같지 않게 다른 새 친구가 생기고, 열심히 했다고 했던 과목에선 그리 점수가 높지 않았다. 이밖에도 수 없이 작고 많은 창피스러운 일들이 내 앞에 쏟아져내렸고, 어렸을 적 뭐든 마음먹은 대로 칭찬받았던 때와 다르게 잘 안 되는 것 투성이었다.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보낸 새해 카드, 성탄절 카드가 남아있다. 처음 맞이하는 관계의 어려움과 마음 같지 않은 공부들로 할아버지에게도 소홀했고, 지극히 그럴 나이었다. 남은 두 카드에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같은 말을 하셨다.


- 성공은 노력하는 자에게 온단다.

- 반드시 노력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단다.


할아버지는 지독히 올곧게도 나에게 노력을 말씀하셨다. 그가 말한 노력이 그 당시에는 '열심히'에 가까웠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삶에서 여전히 되지 않는 일들은 지속적으로 내 앞에 놓여있고, 마음대로 잘 풀리지 않는 날도 있지만 잘 풀리는 날도 있다. 관성의 법칙처럼 잘 풀리다가도 안 풀리고를 반복하면서 내가 나의 삶이지만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받아들이는 것 밖에 없었고, 지금에서야 그것이 최고의 방법이란 것도 알겠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두고 묵묵히 내가 해왔던 대로 늘 그래 왔듯 해가는 것이 그때 할아버지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던 것 같다.


묵묵히 해가는 삶

202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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