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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종 종Mu Feb 08. 2022

지우개똥

누군가

책이 놓여 있었다.

미팅룸 큰 책상에.

며칠째.

첨엔 도서실 실습생이 읽고 있는 책이겠거니 보아 넘겼다. 다음엔 책 옆에 놓인 지우개를 보고, 아하, 연필자국을 지우고 있구나 하고 짐작했다. 그런데 책하고 지우개는 있고 실습생은 안 보인지 오래다. 기간이 끝나서 안 오는 모양.

지울 거 다 지우고 미처 서가에 꽂지 못하고 떠났을 수도 있지...

나는 미팅룸에 외투를 벗으려고 입으려고, 혹은 작업교대의 막간에 들를 때마다, 책상위의 책을 보았다. 서가에 꽂혀 있어야 마땅한데....그래도 내가  주관하는 곳이 아니라 잠깐 궁금증이 일어도 쓸데없이 나서기는 싫었다.  분위기상, 묻지도 건드리지도 않는 게 지금의 입장에서 가장 알맞은 처신이었다.


지금의 입장?말하자면,  어찌어찌 별안간에 도서관 일손을 돕게 된, 굴러온 돌, 아주 잠깐이지만.

그런데 객관적으로 나란 존재는, 도서관 정직원 쪽에서 보면  일을 시키기에 다소 한계가  '보조인력'이다. 뿌리깊은 경로사상의 부작용(?) 터이지만 젊은 자기님들로선 아무래도 부리기(?) 편치 않다는 점이 있다.

십분 양보하여 그것은 둘째치고라도,  인터넷 검색이나 타자를 겨우 치는 정도밖에 아닌 내 컴퓨터 활용능력으로 보아선  지금의 사서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컴퓨터작업을 도울 수 없다.  


암튼 나는 그래서, 책이 놓인 자리에 대해 저 운운하지 않았다. 그래서 책상위에 며칠째 놓여있는 책은  시야 이따금씩 들오고 사라지고를 반복했고, 나는 애써 질문을 참으며  그 며칠을 보낸 것이다.

어림하여 일 주일쯤.

이만하면 귀엽지 않은 나이의 인턴이라도  분수껏 의논해도 되겠거니 싶은 때.ㅡ


오늘 아침, 나는

"이 책....."

두 명의 사서 중 한쪽에게 그 책을 내밀었다.

"아아, 그 책 (책안에 표시된 연필자국을)지워야 해요."

"그럼 내가 지울까요? 다 지우고 서가에 꽂으면 되지요?"

이리하여 책이 내 앞에 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

책제목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제까지 계속 내 눈길을 끌었던 이유가 책제목인 것도 같다.

제목이 스칠 때마다,

죽여 마땅한 사람? 제목도 참 희한하지.라거나

세상엔 죽여 마땅한 사람 때문에 괴로움에 시달리는 그런 경우도 있지, 충분히 알 것 같아.라든지. 아무리 뭣 하다 한들 죽여 마땅한 사람이란 없다,라든지.


하지만 공교롭게도 오늘 같은 날, 즉  어제의 우연치 않은 대화 속에 oo, ㅁㅁ, xx, ox들이 미역줄기처럼 이끌려나오며 그들이 저지른  행태가  징그럽게 미끈덩한 기억의 여운으로 달랑, 이미 단절되었음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모종의 기억을 낳는 두부 한 조각 정도로.  그러한 연유로 하여

손에 든 책제목은 극단으로 과격한 데 비해 과격함이 심하게 결핍물렁한 나에 대하여 잠시 넋을 놓기도. 굳이 깍아내리자면  팬더인 양  게을러서라고....


누구는 책과 지우개를 비장하게 들고 있는 내 앞을 지나가며, 책에 낙서한 누군지가 책 제목에  어딘지 어울린다고 유머를.


하여간 나는 의자에 앉아 오늘 추가된 임무에 충실하자며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란 소설 우선 훌훌 넘겨봤다.

여기까지 지웠군.

전 사람이 앞에서 몇 십 장까지는 지웠다,고 판단하고 그 뒤부터 이어가려했다.

그런데 웬걸! 

앞사람은 한 장 힌 장 꼼꼼히 살피며 지우지 않았던 듯. 거기까지라 여긴 범위 안에서도  연필자국이 적지 않다.

하긴, 한창나이에 지우개질에 흥미를 느끼고 덤빌 아이는 드물지.


그와는 반대로, 지우개를 손에 잡은 감촉이 나를 어릴적으로 데려간다. 연필자국 또한 연필로 글씨를 쓰던 소녀시절의 행복했던 기분을 일으킨다. 나는 어느새 향수에 젖어있다.


그런데 참 특별하기도 하지.

이 책안에 그득한 연필자국은 글의 어느 대목이 중요해 보여서 밑줄을 긋는 것,ㅡ보통 있을 수 있는,  충분히 이해되는 그런 밑줄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띄어쓰기, 아니 내 추측을 보태건대 띄어읽기 부호다.

아나운서 준비생인가?

그런데 이  나레이션에 마땅한 그런 내용은 아닌데...그렇다면 혹시 성우 준비생?

뭔가를 연습하기 위한 표시인 건 분명하다.

되집어서 원래의 띄어쓰기라고 했을 땐, 글쓰는 연습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해낼 수 있는 상상으로 채워가는 지우개질.

V자로 된 띄어쓰기 부호로만 된 연필자국을 지우며 징검다리로  조각조각 어구들을 따라가다가,

'분재처럼 뒤틀리고 구부러진 채•자라다•만•가문비나무•아래'라는 문장에서 멈췄다.

 

가문비나무란 단어가 내 맘에 그냥 촉촉해서였다. 행과 행 사이에 흐르는 서양 현대소설 특유의 건조한 공기 속에 문득 나타난 나무 한 그루 내심  많이 반가와서이다.


가문비나무.

어떻게 생겼을까?

저 고무나무 화분 같을까?

내가 앉아 있는 자리로부터 3,4미터쯤 떨어진 자리에도  메마른 실내공기 속에 이파리 겨우겨우  몇 잎 유지하고 서 있는 고무나무 화분이 있다.

사실 정말로 이름이 고무나무인지 확인하지도 않은 내가 아는 고무나무, 그리고 지우개로 밀다가 만난 가문비나무.


땡볕 벌판에서 푸른그늘이라도 만난 것처럼,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지저분한 지우개똥을 옆으로 쓸어모아 옆으로  치운 다음,  나무 밑으로  그 잎그늘 아래  앉아 가문비나무,가문비나무라고 되뇌어 본다.


 숨소라 같은 되뇌임으로 가문비나무 숲이 그려졌다,  

초일 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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