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이건 비밀인데'라며 타인의 뒷담화나 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자신의 치부를 거리낌없이 드러낼 수 있는 친구 말이다. 지금 나에게는 그런 친구가 없다. 하지만 괜찮다. 친구라고 해서 내 비밀까지 속속들이 알아야하는 건 아니니까. 때로는 비밀을 쉽게 터놓지 못하는 어려운 친구가 더 오래도록내 곁에 남을 수도 있다.
20대 초반 철없던 시절, 내겐 절친이 한명 있었다. 한달에 한 20일쯤 만나는 친구였다. 그 친구와는 같은 취미를 공유하며 급속도로 친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팬클럽 활동을 함께 하고, 한창 빠져있던 농구단의 경기도 보러 다녔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게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좋은 친구였다. 그 이외에도 매일 만나 실없는 장난이나 하는 친구였고 비밀이 거의 없었지만, 서로에 대해 완벽히 알려고 하진 않았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비밀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친한 동네 사람이 말하는 그 집에 숟가락이 몇개인지도 안다는 그런 비밀말고, 내면의 작은 마음 같은 것 말이다. 때로는 내 부모에게도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거의 매일 붙어다니다 보니 우리는 서로의 지인들까지 다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들과의 만남에도 늘 함께였으니 말이다.
각자 처음 보는 지인들은 우리를 사뭇 이상한 시선으로 보곤 했다. 이성친구가 아닌 친구를 지인과의 만남에 동행하는 일이 그들에게는 매우 낯선 일이었을 것이다. 그땐 그런 시선은 내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할 것도 같다.
그 중 나이가 많았던 친구의 한 지인은 내게 왜 항상 그녀와 함께인지 물었다. 내 친구에게 비밀 얘기를 해야 하는데 내가 있어서 하기 불편하다고 말했다.
늘 함께 붙어 다니니 급기야 그녀는 내 앞에서도 자신의 비밀들에 대해아무 거리낌 없이말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심각한 범죄행위도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내 친구는 마치 그녀에게 고해성사를 듣는 신부님 같았다. 그녀에게 그런 말들이 부끄럽지 않냐 물었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내 친구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이유는 그녀와 내 친구 사이에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기 때문이라고.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픈 친구가 아닌 언제든 만나지 않아도 될 사이라고 말이다.
성당에서는 해마다 판공성사(신자들이 의무적으로 하는 고해성사)를 하는 시기가 있는데 그때마다 신부님들은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한다. 내가 아는 신부님은 살인 빼곤 거의 다 들어봤다고 하실 정도였다. 타인의 비밀을 들어주는 것은 때론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녀에게 내 친구란 마음을 터놓고 비밀을 말할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친구가 아니라 감정쓰레기통 같은 거였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에만 담아두기 버거운 비밀들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덜 수 있는, 상대의 입장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행위였다. 그 대상도 적절했다. 자신의 친척이나 지인과의 교집합이 없는 사람, 자칫 잘못되더라도 문제없을 만큼 하찮은 그런 관계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간혹 오해를 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소하고 재밌는 비밀들을 알고 싶을 뿐, 듣고 싶지 않은 비밀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에게도 비밀에게도 가끔은 예의가 필요하다.듣고 싶지 않은 자에게 비밀 얘기를 하는 건 친구에게도 비밀에게도 미안한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