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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어둠에 익숙해지는 시간

by 김소연 Sep 08. 2023



#02. 어둠에 익숙해지는 시간





인생에 정전이 되는 순간




_ 엄마!!! 또 정전이야!

_ 으앙. 꼭 전설의 고향 볼 때 정전이 된단 말이야. 엄마! 귀신이 장난치나 봐.







 한창 울상이 되어 울먹이고 있으니 역시나 이웃집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네는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집보다 분위기가 더 스산해졌다. 마치 이 집 저 집에 흩어져있던 귀신들이 모여 합창을 하는 것 같았다.



 나 어릴 적 살던 동네에는 정전이 자주 됐다. 꼭 한여름 밤, <전설의 고향>을 볼 때였다. 왜 꼭 클라이맥스에 정전이 되는지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아마 그때쯤 <전설의 고향>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을 거다. 전력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던 시절, 그 당시 가전제품의 소비전력 지금보다 배는 높던 시절이었다. 정전이 된 여름 밤은 무고 길었다.



 엄마는 겁에 질린 내게 잠시 눈을 감고 다섯을 세면 거짓말처럼 세상이 밝아질 거라 말했다. 겁에 질린 아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천천히 하나, 둘, 셋, 넷, 다섯까지 세고 빼꼼히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형광등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거짓말처럼 세상이 밝아졌다. 엄마의 손에는 촛불이 들려 있었다.



_ 에이 거짓말! 세상이 밝아지는 게 아니라 엄마가 초를 켠 거잖아!


_ 거짓말 아니야 정말이야. 어두울 때는 눈을 감았다가 뜨면 아주 흐릿하겠지만 빛이 없어도 세상을 볼 수 있어. 눈에게 어둠을 견뎌낼 시간을 주는 거야. 그러면 금세 회복되거든.



 엄마의 말은 다 거짓말이었다. 엄마는 어떻게 내가 다섯을 세는 동안 초를 찾아서 불까지 켤 수 있지? 엄마는 참 대단한 초능력자 같았다. 겁에 질린 내가 천천히 다섯을 셀 때까지 엄마는 두려움은 쳐두고 초를 찾았을 거다. 하지만 언젠가 또 정전이 되었을 때 나는 엄마의 말이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주 천천히 다섯을 세는 동안 엄마는 그날따라 집안 어딘가에 있는 초를 찾지 못했다.



_ 엄마 정말이야. 정말 엄마가 보여.



 아주 옅은 달빛이 비친 세상은 오히려 조금 아름다운 것 같았다. 선풍기도 작동을 멈고 냉장고도 열어서는 안 되지만 가만히 누우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둠 속에서 소리는 더 크고 멀리까지 닿는다. 빛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잊고 있던 다른 감각들이 깨어난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귀를 쫑긋 세우니 매끄럽던 피부가 제각기 성을 냈다.



 갑자기 어둠을 맞이한 눈에게는 어둠을 견뎌낼 시간을 주어야 한다. 엄마 말이 맞았다.






인생에서 가끔은 제자리걸음이 필요해




_ 시작은 반이야. 한 발짝만 떼면 반은 간 거지. 왜 용기가 없어? 왜 아직도 그 자리야?



 학창 시절 우리 반엔 운동신경이 매우 부족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교련시간에 '좌향좌 우향우' 제식훈련을 할 때마다 손발이 제멋대로 나갔다. 오른발과 오른팔 왼과 왼팔을 한꺼번에 흔들며 허우적댔다. 친구들은 바보 같다 놀려댔지만, 그는 우리 반 반장이었다. 에게 교련시간은 캄캄한 어둠과 같았, 운동장 한 구석에서 제자리걸음을 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웃음소리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제자리걸음은 내가 세상을 살며 아주 유용한 가치있는 일이 되었다. 어둠에서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갑자기 어둠을 만난 사람게는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정전이 됐을 때 우리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을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삶에서 어둠은 정전이 되는 것처럼 급작스럽게 온다. 갑자기 어둠에 놓인다면 엄마의 말처럼 숨을 고르고 천천히 다섯을 세야 한다. 다섯을 다 셀 때까지 그 속도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일초에 한 번을 세, 한 시간에 한 번을 세,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언젠가 내가 눈만 뜨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를 잘 모르는 어떤 이는 내 눈이 회복되기도 전에 나아가라 등을 떠민다. 하지만 비가 되지 않은 걸음은 의미가 없다. 내 눈을 가린 어둠이 나를 정반대방향으로 이끌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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