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보선생 Dec 07. 2023

섬광같은 통찰

아디야 샨티 명상 수련 점심 시간에 얻은 통찰


지난 글 <아디야 샨티 침묵 명상 수련>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아디야 샨티 명상 수련 첫째 날 수련장을 뛰쳐나가고 싶었습니다. 둘째 날 마음이 조용하게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셋째 날 명상 중에 갑자기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마치 사방을 막고 있던 유리가 깨어져 무너지는 것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며 마음이 열렸습니다. 다시 가벼워졌습니다. 지극히 가벼운 평화와 생생함이 느껴지며 몸마저 걸림 없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가운데 생생하게 깨어 있었습니다. 오후에 숲길을 산책하는데 어린아이처럼 이리저리 팔을 흔들며 즐거웠습니다. 수련 내내 집중하고 고요하려고 애쓰던 것이 멈추었습니다. 아.. 애써서 현존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냥 이대로 현존이구나. 



@ www.pexels.com



수련원에서의 식사는 수련 기간 동안만 식당으로 변모한 것처럼 보이는 소강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수련원의 직원들과 아디야 샨티 수련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매끼 정성 들여 준비한다는 식사는 소박한 채식 식단으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명상 수련답게 비건용 음식들이 많았습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 앞에는 들어간 재료와 알레르기 성분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없고 눈도 마주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조용히 쟁반을 들고 천천히 뷔페 테이블 앞을 유유히 흘러 지나갔습니다. 고요한 식당에서는 찰크락 찰크락 식기 부딪히는 소리, 조심스럽게 식기를 내려놓는 소리, 천천히 의자를 끌어 앉는 소리와 창문 밖의 새소리가 어우러져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침묵 명상 수련에서는 모든 활동이 명상이 됩니다. 식사 시간은 훌륭한 명상 시간입니다. 하루 종일 고요히 앉아서아무런 외부 자극 없이 머물던 터라 마음은 식사 시간이 아주 즐겁습니다. 그 어느 오락시간보다 즐겁습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즐길 거리가 생겨 신이 납니다. 이순간 나타나는 아주 작은 감각에도 집중하게 됩니다. 음식의 모양과 색깔, 향은 음식이 입에 들어가기 전부터 마음을 채웁니다. 천천히 포크를 들고 내리는 팔의 움직임마저 훌륭한 반찬이 됩니다. 그렇게 식사를 하면 조금만 먹어도 만족감이 속을 가득 채웁니다. 많이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배부르지 않아도 만족스러운 식사가 수련에 큰 도움이 됩니다. 배가 부르면 명상할 때 졸리기 때문입니다. 


수련 넷째 날의 점심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채소 수프 한 그릇과 통밀빵 한 조각을 챙겨서 식당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토마토, 애호박, 감자, 당근, 샐러리, 양파, 병아리 콩, 갖가지 야채를 넣고 오랫동안 푹 끓여 걸쭉한 채소 수프의 색깔이 너무나도 선명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입에 닿은 온기 넘치는 채소 수프는 태어나 처음 맛보는 음식처럼 새롭고 생생했습니다. 



www.pexels.com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단편적인 기억들이 여럿 순식간에 떠올랐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기억들이 순식간에 줄줄이 실로 꿰듯 연결 지어지며 한순간에 번쩍 떠올랐습니다. 떠오름과 동시에 통찰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억들의 의미와 그 속에서 내가 얻어야 할 인생의 메시지가 나타났습니다. 섬광 같은 이해가 일어났습니다. 


그 떠오른 사건들과 내용의 연결 지어짐은 예전 글 <어머니 삶의 결 2> 에서 자세히 쓴 적이 있습니다. 


통찰에서 얻은 인생의 메시지는 "순응"이었습니다. 


순응은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에 나타난 모든 것에 대해 마음에서 무조건적인 "Yes"로 답하는 것입니다. 이 순응은 소극적인 양보나 회피의 마음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에 드러난 모든 것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과 있는 그대로의 철저한 받아들임입니다. 부정적인 판단과 감정의 에너지로 일어난 일을 거부하고 마음으로 저항하며 삶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여 흐르는 삶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에 순응한다고 해서 앞으로의 변화하기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어난 일에 저항하는 에너지를 내려놓고 마음으로 순응할 때 변화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온전한 순응의 상태에서 그 받아들임의 평온과 만족감 속에서 나타나는 지혜에 근거하여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매 순간 실재하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지난 글 지금 이 순간의 비밀 참조).그리고 미래의 현실은 지금 이 순간 나의 내면의 마음 상태에 의해서 창조된다고 했습니다. (지난 글 힘 빼고 사는 삶의 힘 참조)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나의 에너지를 이미 기억 속의 내용일 뿐인 과거의 사건에 저항하며 머무르면 계속해서 저항할 수밖에 없는 미래가 반복되며 창조됩니다. 일어난 일에 온전히 순응하는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의 이 경험에 거스르지 않으면서 삶과 함께 흐릅니다. 받아들임의 평온 속에서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오직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원하는 삶의 창조의 방식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섬광처럼 얻은 순응의 통찰로 그 자리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수련장을 찾게 된 이유였던 남편에 대한 원망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저 각자 나름의 시선 속에서 자기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함께 이어져 하나의 거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 된 그 자리에서 만물이 자유롭게 개성을 드러내며 완벽하게 조화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며 흐르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세상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가슴에서 샘솟았습니다. 다시 삶이 사랑속에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결감의 회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