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작품은 고통스러운 동시에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한강을 읽는다는 건 고통을 마주하는 일이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읽어도 소용이 없다. 그녀의 작품을 읽다 보면 우울감과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평소에 우울감과 슬픔을 멀리하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에게 한강의 작품 읽기는 크나큰 도전이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읽은 이번 주 3일은 나에게 도전과도 같은 날들이었다.
한강 작가는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고 했던가. <작별하지 않는다>를 집필할 때는 다음 두 질문에 집중했다고 한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질문을 변형해서 한강 작가에게 이렇게 다시 묻고 싶다.
한강의 작품은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작품 속 문장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희랍어 시간>도 다른 한강 작가의 소설처럼 우울감이 느껴져 고통스러웠지만 보석 같은 문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어를 잃어가는 한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만남 혹은 교감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책은 알콩달콩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이름도 나오지 않는 남녀주인공이 마지막에 서로를 안고 입맞춤을 하지만 이게 과연 사랑일까 싶었다. 사랑이라는 표현보다는 자신과 닮은 타인에 대한 연민 혹은 생존을 위한 소통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 이 책을 읽어나갈 때는 언어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뛰어난 언어 감각을 보여준 여자 주인공은 타인의 언어에 상처받으며 말을 잃게 되고 ‘비블리오떼끄’라는 프랑스어를 발음하면서 다시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과 이혼 후 따로 살게 된 아이에 대한 그리움과 같이 원치 않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이십 년 만에 다시 침묵하게 된다. 그녀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그리스의 고대 언어인 희랍어를 배우면서 침묵에서 벗어나려 한다.
유전병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주인공은 어릴 적부터 독일에서 살았다. 청각 장애를 가진 첫사랑과의 이별은 그에게 상처였고 친구 요아힘의 죽음은 충격으로 다가와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독일에서 인정받았던 희랍어를 가르치는 강사로 살아가고 희랍어 수업에서 말을 잃어버린 그녀를 만난다.
우연히 건물로 날아 들어온 새를 구하기 위해 나섰던 그는 안경이 깨지면서 오히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고 이때 그녀가 앞을 볼 수 없는 그를 도와주면서 소통을 시작한다. 그녀는 그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이야기하고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한 후 그의 집까지 데려다준다. 그는 그녀에게 그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그녀는 인기척으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한다. 이렇게 그와 그녀의 만남이 시작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이야기는 끝이 난다. 아래 두 문장을 마지막으로.
소리 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P.184
알쏭달쏭한 이 문장들을 보면 만남의 시작과 끝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로 인해 서로에게 온기를 줄 수 있는 만남이 시작된 건가 싶기도 하다가 서로의 인생을 알지 못하고 결국 어긋나는 결말인 것 같기도 하다. 맨 처음 시작하는 보르헤스의 묘비명인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라는 다양한 해석의 문장처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한강 작가는 이 소설을 쓸 때 아래 질문으로 시작했다.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언어적인 폭력과 물리적인 폭력으로 이어진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묻고 있다. 작가는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끝까지 읽어 내려가니 나에게 이 책의 주제는 언어라기보다 소통이었다. 덧없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것은 촉각을 통해서라도 소통하려는 의지가 아닐까. 눈이 보이지 않고 말을 할 수 없어도 촉각으로 소통하는 그와 그녀처럼.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P.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