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정녕 여자의 계절
-싸이 감성
가을.
이 계절의 이름에서는 노을빛이 묻어난다.
누가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고 말했는지...
빛바랜 사진들처럼 가을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앞을 보고 걷던 내게 뒤에서 속삭인다
나도 모르게 흘끔 뒤돌아보게 되는 가을.
가을은 건조하면서도 축축하고 바삭거리면서도 눅눅하다.
가을은 결코 슬프지는 않다.
조금 서글픈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그건 슬픔은 아니다.
설렘과 애틋함. 그리움과 서러움. 보드라우면서 깊은 감정들.
가을 낙엽을 밟으면 바스락거린다.
바스락거리는 것들은 많이 있지만 가을 낙엽의 바스락 거림은
과거의 아련한 무언가를 일깨운다.
그것은 뚜렷한 영상으로 떠오르지 않더라도 가슴을 울린다.
이미지로 기억되는 추억.
추억의 바스락 거림을 밟고 걷는 길은 오색찬란하다.
연휴의 끝. 너무 잤나 싶은 마음과 부은 얼굴.
뛰는 가슴과 늘어지는 몸.
복잡한 머리와
설레는 가슴.
사랑해
아티스트 : Fly to The Sky
앨범타이틀: No Limitations
나의 싸이 시절에는 가을이 노을로 물든 채 바스락거리면서 제대로 왔었나 보다. 지금의 가을은 여전히 덥다가 하룻밤새 추워지곤 하는데 말이다.
가을이 오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몰랑몰랑했었는데 지금의 나는 가을? 어딨는데... 이러고 있는 중.
그래도 이제 저녁 바람은 꽤 선선하다.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선선해지니 산책을 종종 하게 된다. 느리작거리다가 해가 중천이 되면 여전히 볕이 강해 통구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산책을 하는 날이면 나는 남편이 출근할 때 같이 집을 나선다. 요즘 나의 산책코스는 고모호수공원 둘레길 한 바퀴. 국립수목원 근처에 있는데 우리 집에서 차로 가면 그리 멀지 않다. (고모호수는 호수라고도 하고 저수지라고도 하는데 나는 그냥 호수라고 부르기로 한다.)
고모호수를 둘러 한 바퀴를 도는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내 걸음걸이로 대략 40분 정도가 걸린다. 경사진 곳도 거의 없어 땀도 나지 않는 수준이지만 물과 나무를 보며 걷다 보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든달까...?
데크길을 걷다 보면 나무들이 호수를 향해 기운 채 터널처럼 얼기설기한 그늘을 만들어 놓은 곳이 있는데 날이 좋을 때 그 아래를 지나면 엄마품에 안긴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진다. 엄마품... 엄마품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엄마가 있고 엄마품에 안긴 적도 있을 텐데 어째서인지 엄마품이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상징적으로 느껴지는 엄마품은 이런 느낌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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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가을 하늘과 진녹빛 호수 위로 윤슬이 반짝이고 공기에도 반사판이 적용된 듯 눈부신 풍경 속을 걷는다. 백수와 주부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나는 비록 생산적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한다는 것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체력도 약한 편인 데다 무한 게으름이 장착되어 있는 나는 의식적으로 뭔가를 하지 않으면 하루를 10분처럼 허비해 버리기 때문이다.
한참을 걷다가 우연히 발아래 작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 서서 내려다본다. 그것은 너무 작아서 허리를 구부려야 보일 것 같은데 나는 지금 허리디스크라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것을 본다. 의도치 않게 더 자세히 관찰하게 된 상황.
햇살과 햇볕으로 빛나는 산책로에는 제 몸보다 몇 배는 큰 뭔가를 이고 가는 개미가 있었다. 예전에 등산로에서 엄청난 크기의 짐을 이고 지고 산을 오르는 아저씨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허리도 얇고 빼빼 마르고 자그마한 개미가 부지런히 등짐을 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는데 빠릿빠릿한 걸음에선 힘에 부치는 기색조차 없었다. 찾아보니 개미는 세상에서 쇠똥구리 다음으로 힘이 센 곤충이라고 한다.
천하장사 개미를 잠시 구경하다가 이번에는 데크길 끄트머리에서 꿀렁이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온몸으로 웨이브를 타면서 자기 딴에는 최선으로 달려가고 있는 애벌레가 있다. 마라톤 경기를 위한 체력단련인 건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오동통한 몸으로 미친 듯이 꿀렁꿀렁하는 모습을 봐서는 지금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고요하고 한가롭게 그저 한량처럼 반짝이는 산책로인 줄 알았는데 이곳은 치열한 생활의 터전이요 생명들이 움직이는 역동의 공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산책하고 있었던 것뿐인데 나는 얼마나 많은 개미들을 밟아 죽이며 걷고 있었을까? 나는 내가 죽인지도 모른 채 잔인한 살생을 저지르고 살고 있고 죄 없는 개미들은 이유 없이 무방비로 죽어간다고 생각하니 조금 슬퍼졌다.
하지만 슬픔도 잠시. 나는 금세 잊고 다시 햇살을 만끽하고 범죄 유튜브를 들으며 얕은 산길을 걷고 피톤치드에 젖어든다.
짧은 산길을 지나면 그늘이 없는 뙤약볕 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물길을 막은 것인지 다리같이 되어있는 시멘트길은 나무 한그루 없이 온몸으로 햇볕을 받으며 하늘과 물 사이에 뜨겁고 건조하게 뻗어 있다. 이마에 땀이 맺히고 눈이 부셔 미간이 찌푸려진 채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한 아주머니가 지나간다. 양산을 얹어둔 듯 챙이 넓디넓은 모자를 쓴 아주머니는 이 구역의 프로 산책러인 것 같았다. '... 맞다! 모자. 또 까먹고 그냥 나왔네.' 다음 산책에는 모자를 꼭 챙겨 오리라 다짐을 하며 걷는데 이번에는 아저씨 등장. 수분 가득 유난히 탱글탱글하게 잘 말린 머리칼을 자랑하며 한 아저씨가 다가오고 있다. 마치 미용실에서 갓 나온 듯한, 왠지 파마약 냄새가 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자외선 차단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것 같은 진한 컬러의 선글라스까지 착장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 아저씨도 초짜는 아니다.
복슬복슬 하얀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모녀와 눈이 마주치고 개량한복을 입은 채 벤치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는 노부부도 지나친다. 다이어트 중인 것 같은 아주머니 둘은 팔토시까지 차고 경보를 하듯 팔을 앞뒤로 흔들며 파워워킹으로 나를 지나쳐갔고, 인기척을 내도 비켜주지 않고 나란히 걷는 세 명의 느림보 가족을 추월할 때는 등뒤로 레이저를 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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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을 한 바퀴를 돌아 원점으로 오면 약간 더워지면서 목이 마른다. 원래라면 얼죽아인 나는 이제 시원한 아아로 개운하게 산책의 마침표를 찍었겠지만 현재 한약을 복용 중인 까닭에 커피도 먹을 수 없고 아이스도 안된다. 예전 같으면 한약이고 자시고 아아뿐 아니라 시원한 맥주라도 마셨을 나였지만 지금은 목적이 있어 몸을 보하는 중이라 꾹 참아본다.
싸이시절 나는 가을이 오면 괜히 더 센티멘탈해져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으며 상상과 상념 속을 떠다녔다. 낮에는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들어와서는 알딸딸한 채 컴퓨터 앞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꾸역꾸역 감정들을 불러 모아 싸이에 감성적인 글들을 써 내려가며 멜랑꼴리한 밤을 즐겼다. 싸이갬성에 취한 시간들은 마치 겉멋과도 같았으나 또한 진짜로 즐거워서 계속 찾게 되는 중독성 있는 취미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은 그 감성이 작동하지 않는 듯 하지만 비현실적인 감성보다 현실이 더 생생하고 강렬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기쁨과 행복, 치유와 감사. 슬픔과 아픔과 상실과 좌절. 현실은 신데렐라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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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서 더 귀해져 버린 가을이 이렇게 다시 시작됐다. 맑고 화창한 날씨가 얼마나 지속되어 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계절을 최대한 즐겨보기로 다짐한다. 귀찮아도 밖으로 나가 가을이 물들어 가는 찰나들을 최대한 느껴보고 싶다.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지난 추석연휴 때 세일에 눈 돌아가서 이것저것 사둔 가을 옷들이 지금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면서 옷장 안에서 부릉부릉 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은 여러분에게 어떤 계절인가요?
※ 상단의 글은 오래전에 싸이월드에 올렸던 글이다. 노래 제목은 글을 쓸 때 들었던 곡이니 싸이 감성을 증폭시키고 싶다면 틀어놓고 읽어보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