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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박변 Oct 26. 2020

뉴욕박변: 돈에 대한 생각을 바꾸다.

좋은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돈 없이는 못한다.

갑자기 잡힌 첫 데이트에 이미 1시간 반이나 늦어, 급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자나 깨나 더 나이 들기 전에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는 엄마는, 항상 내가 일에 파묻혀 사는 것을 매우 속상해한다. 딸이 첫 데이트를 하러 간다는 말에 엄마는 질문이 많았다. 면접도 아닌데, '잘하고 와'라며 엄마는 전화를 끊는다.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그의 뒷모습과 옆모습이 보인다. 식당 매니저와 얘기 중이다. 내가 맨해튼까지 운전해서 가는 동안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그는 미리 레스토랑에 가서, 메뉴를 보고 내게 뭘 먹고 싶은지 미리 주문하겠다고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전화해, 혹시 음식 알레르기가 있느냐고 물었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 앉으니, 그가 웃으면서, 안 그래도 매니저가 상대가 오긴 오는 게 맞냐고, 30분 있으면 레스토랑 문이 닫는다고 해서, 곧 오고 있으니 음식을 데워 달라고 하긴 했지만, 바람맞는 게 아닌가 속으로는 식은땀이 흘렀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서로 바쁜 탓에 가끔 만났지만, 만나면 할 얘기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넌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5가지가 뭐야?' 물었다. 그는 생각할 시간도 없이, "첫째, 백만장자가 되는 것, 둘째, 좋은 남편과 아빠가 되는 것, 셋째, 건강하게 늙는 것, 넷째, 멘토가 되는 것, 다섯째, 아이티에 리더십 학교를 세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섯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첫 번째 목표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나도 오랫동안 이루고 싶은 두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아빠 이름으로 장학금 재단을 만들어, 부모의 교통사고로 학업을 계속하기 힘들어진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이고, 하나는 소외된 계층을 위해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언젠가'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선이었지, 이 사람처럼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돈이 없으면 좋은 일도 못하게 된다는 현실을 그는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대학 다닐 때, 한국 근대사를 가르쳐 준다는 홍보물을 보고 궁금해 찾아갔다. 그리고는, 그때 만난 사람들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한국외대를 나오고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한 언니를 만났는데, 그 언니는 모든 사람에게 '진심'이었다. 결국,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좋아서 나는 그 단체를 가입했고, 거의 가입하자마자 나는 일당백씩을 하는 선배들을 보고 놀랐었다. 그 당시에는 종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 사회에 부각시키는 캠페인을 하고 있었다.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대학 총장실 국제 협력부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국회의원들과 판사들에게 이런 문제를 법안으로 상정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적었다. 곧, 하와이 주의 마이클 혼다 의원과 파킨슨 병으로 지금은 돌아가신 일리노이주의 레인 에번스 의원이 이 문제를 미국 국회에 상정하는데 힘을 실어 주겠다고 했고, 그 법안 ('bill')이 미국 국회에 소개되는 전 날, 한국에서 오신 고 김순덕 할머니와 우리는 워싱턴 디씨에서 만났다. 우리 말고도 60여 개의 단체들이 함께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 후 다시 캘리포니아에서 만나 할머니께서 증언을 하시는 일정을 함께했다. 그러다 나는 갑작스러운 아빠의 사고로 모든 것을 중단하고 한국에 가게 되었다.


10년 만에 다시 뉴욕에 와서, 로스쿨을 시작하고 찾아간 그 단체는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대학 때 알던 선배 중 몇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소외된 한인들을 위해 푸드 스탬프나 렌트 문제, 시민권 신청 문제, 청소년 서류 미비자 신청서, 세금 보고 등 이민자들에게 꼭 필요한 단체로 꾸준히 일을 해 오고 있었다. 나도 로스쿨을 졸업하고 펠로우로 나도 청소년 서류 미비자 신청을 돕는 일을 했고, 그러다 몇 년후에는 그 단체에 '이사'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일을 할 맘은 되어 있었지만, 나는 내가 재정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발로 뛰는 일을 더 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고심 끝에 함께 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참석한 이사회에서, 이사 모두는 우리 스태프들의 연봉을 올려 줘야 한다는데 합의했다. 그렇지만, 특정 정치당의 편을 들면 안 되는 단체의 성격상, 주는 돈도 거절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랜트를 요청할 때도 제한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에는 이사진이 갖춰야 할 자질은 뭐니 뭐니 해도 후원을 끌어낼 수 있는 리더십이었다. 막상 들어가고 보니, 나는 이사로서 그 단체가 꼭 필요한 재정적 역량을 갖추지 못해서 그만두었다. 내가 돈이 많아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옳다 그르다 의견만 내는 것은 단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도, 좋은 맘으로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날은 그가 집에서 저녁을 해줬다. 브론지니 생선구이와 삶은 브로콜리. 저녁 식사를 하면서, 뜬금없이 내가 말했다. "난 부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 뭔가, 다른 이들에게 돌아갈 몫을 빼앗은 사람들인 거 같아서 같이 어울리기 싫어." 그가 물었다. "분명,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을 건데, 그게 뭔지 말해 줄 수 있어?" 나는 대답을 쉽게 할 수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왜 돈 많은 사람들은 나쁘다고 생각했을까? 그러고 나서도, 며칠 동안 생각을 했는데도 답을 찾을 수가 없다. 그가 말했다. "돈이라는 건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돈이 있어야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도와줄 수 있고, 네가 돈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그의 말이 맞았다. 돈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무조건 "돈=악"하던 나의 단순한 관점이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좋은 일을 하는데도 자기 몫이 있는 것이다. 누구는 생활고를 견디며 사명감으로 발로 뛰는 일을 하고, 누구는 돈을 벌어 그 사람의 생활고를 덜어줄 수 있는 역할.


결국 "돈은 행복을 가져다준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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