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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그리고 시작

by 전선훈 Dec 12. 2024

2019년 12월 24일.

미얀마에서 맞이한 크리스마스이브.


20년간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를 거치며 해외 주재원 생활을 하는 동안 크리스마스 이브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저 평범한 날이었고 지인들과 카톡으로 성탄 축하 메시지를 주고받는 게 전부인 하루였다.


하지만 이날은 아주 특별하게 기억되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별로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날의 전화 한 통은 나에게 첫 절망감을 안겨준 그런 날이었고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하는 그런 날이었다.


“전 지사장… 잘 지내고 있지요?”


평소엔 별로 전화를 하지 않던 베트남 법인의 대표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주 반가운 목소리로 받았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하하하. “

“미얀마도 크리스마스 있나? 불교 국가인데…”


“네. 여기는 다민족 국가라 불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다 관대합니다.”


“그렇구먼…”


대표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헛기침을 한번 하고 나서는 말을 이어나갔다.


“전 지사장… 오늘 본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좋지 않은 소식이라서...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연말에 들리는 소식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누군가의 승진 소식이고 또 하나는 누군가의 권고사직에 관한 소식일 뿐이었다.


나도 50이 넘은 중견 간부이니 베트남 법인 대표의 전화는 바로 후자에 해당되는 소식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내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자 대표는 오히려 힘이 난 듯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회사에서 해외 근무를 제일 오래 한 것 같은데… 얼마나 되셨죠?”


평소와 다르게 존칭어를 사용하는 대표의 말투와 사무적인 어투는 내가 생각한 느낌을 더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사무소 시절부터 근무를 시작했으니 벌써 18년이 넘었습니다. “


“참… 고생 많으셨네요. 그리고 정말 오래되었네요. 본사의 방침에 따라 나이와 오랜 해외 생활 근무자부터 조정을 해 나가기로 해서 미안하지만 이렇게 전화로 통보를 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나한테도 올일이지만 이렇게 직접 통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별로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이해 바랍니다. ”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냥 대표의 전화 목소리를 듣고 만 있었고 대표 또한 그리 경쾌하지 않은 목소리로 착잡해하는 표정이 전화기 너머로 보이는 듯했다.


“대표님.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톡이나 문자로 안 받아서 다행입니다. 조만간 호찌민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진행 중인 미얀마 사업에 대한 인수인계 작업 최대한 빨리 마치고 들어가 뵙겠습니다.”

“그래요. 천천히 마무리하고 들어와서 봅시다.”


대표의 말투는 끝까지 사무적이었고 그 말투가 더 마음을 상하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색한 전화 통화를 끝내고 나니 그동안 몸 담았던 회사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그래도 대기업이라는 이 회사에 평생을 바쳤고 언젠가는 이별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 이별의 시간이 고작 전화 한 통화로 끝이 난다는 게 많은 아쉬움과 회의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애초에 직장생활에 아름다운 이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막상 내가 그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쉽지는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저녁 시간이 되지 않았다.


이런 날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는 더 큰 상실감을 느끼게 될 것 같은 생각에 후배를 만나 우울한 마음을 표 나지 않게 하려고 나는 평소보다 더 과장된 모습과 표현으로 술을 먹기 시작했고 얼마를 마셨는지 기억을 못 할 정도로 취해서 미얀마에서의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냈다.


띵띵 딩기 딩기 띵띠리리리…


가끔씩 카톡 보이스톡의 연결음은 어깨를 들썩이게 할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회사로부터 정당한 대가를 받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해보기도 했지만 언론 기사 어디에서도 저작권료들 지불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는 못했다.


서울과는 시차가 두 시간 반이 나는 곳이라 늘 보이스톡을 하면서도 매일 와이프에게 물어보는 나의 첫말은 항상 똑같았다.


“일어나셨나?”


“그럼… 지금 여기 시간이 몇 신데… 어제는 좀 달리셨나 봐? 카톡을 해도 안 읽어보던데…”


“어.. 어제 후배랑 예수님 오신 날이라 축하 좀 했지… 부처님의 나라에 오셔서 고생하신다고… 하하하...”


“당신… 어제 무슨 일 있었지? “


나의 과장된 말투에 뭔가를 느꼈는지 와이프의 질문에 나는 그냥 얼음이 되어 버렸고 여자의 촉은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민하지 말고 들으셔…”


나는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지난밤 있었던 일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사실 좀 떨렸다.


그리고 최대한 와이프가 상처받지 않도록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내 입장도 그리 편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빨리 와버린 상황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와이프는 한참 동안 내 얘기를 듣고 나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고 그런 와이프의 목소리에 떨린 마음이 좀 진정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여보…그동안 수고하셨어요… 언젠가는 다가올 일이었고 그날이 우리 예상보다 조금 일찍 온 거라 생각하고 이제는 좀 가벼운 마음으로 마무리하셔… 당신이 그동안 가족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셨나… 한국으로 들어와 좀 쉬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좋은 일이 또 있을 거야. 차라리 이번 기회에 기러기처럼 혼자 떨어져 사는 시간을 마무리하는 것도 좋은 기회라 생각하자.”


와이프의 응원 메시지에 기분이 좀 풀리는 느낌이 들었고 오랜 시간 해외에서 보낸 시간을 정리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오히려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당신이 잘 이해를 해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네. 이젠 더 이상 떨어져 살지 않아도 되고… 호두 산책도 매일매일 해줄 수 있고… 하하하.”


“그래. 호두 산책도 매일 시키고 그동안 못 다녀본 한국도 많이 놀러 다니고 그러자. 당신 들어오면 가볼 곳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갑자기 나도 신나고 그러는데…호호호.”


“알았어. 여기 정리하고 그러면 한 달 정도 더 있어야 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빨리 마무리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테니…”


“쉬엄쉬엄 해요. 무리하지 말고… 알았죠?”


“너무 걱정 말고… 내가 잘 알아서 하고 갈게. 그래도 마무리는 깔끔하게 해 줘야지. 씹던 껌처럼 직원을 대하는 회사처럼 나도 똑같이 할 수는 없지. 그래도 글로벌 매너가 있는 사람인데… 안 그래? 하하하.”


전화를 끊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사무실을 나갈까 말까 하는 잠깐의 고민이 있었지만 집에 혼자 있으면 오히려 마음이 더 상한 채로 하루 종일 누워있을 것 같아서 사무실로 나가기로 정했다.


사무실로 향하는 길은 평소와 다르게 꽉 막힌 채 움직이지 않았고 덕분에 차분한 마음으로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볼 시간이 생긴 것 같아서 좋았다.


직장인의 인생…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더 아프고 맘이 상했을 텐데 더 다치기 전에 적당한 높이에서 내려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라 생각하며 때로는 불편 부당한 일들도 다 참고 견디며 거침없이 질주하던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지만 이제는 그냥 과거의 경험만 남아 있을 뿐이었고 정작 내손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좀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운 좋게 태풍을 피해 간 사람들도 또 다가올 태풍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직장인들의 삶이고 어쩌면 숙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또 다른 시작의 길을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회사가 아닌 오롯이 나와 가족을 위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정체가 풀려 천천히 사무실로 향하는 도로변으로 얼굴에 다나까 분 칠을 한 탁발승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마치 가부끼 화장을 한 여인처럼 보이고 그 어떤 고민도 없어 보이는 세상 편한 모습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세상 평온한 모습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탁발승의 모습에 묘한 삶의 생동감이 느껴졌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아우성치며 살아온 건 아닌지 하는 반성도 들고 그래도 그동안 꽤 행복한 생활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3살 적 부모와 함께 베트남으로 건너왔던 쌍둥이가 아주 순수하고 바른 친구로 성장해 주었고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서 젊은 날의 멋진 추억을 만들고 있으니 얼마나 축복받을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 살 맛난 이유를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 느끼지 못하던 내 주변에서 일상적인 삶의 작은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면 그게 바로 세상 살 맛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


이제는 환하게 웃으면서 해외에서의 기러기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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