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 순응함으로 얻은 안식

<역마>, 김동리

by 김선우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흘러서 세 갈래로 나 있었다."


2025.3-1..jpg?type=w580 화개장터

소설 <역마>(1948)의 첫 문장은 화개장터의 지리적 특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삶의 모습도 암시한다. 물과 길이 만나고 갈라지는 길목에선 대개 사건이 발생하고 운명이 갈라지기 마련이다. 하동, 구례, 쌍계사의 세 갈래 길목인 화개장터가 그런 곳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그 인연에서 기인하는 사건 속에서 운명에 저항하다 끝내는 순응하는 선택지로 나아가는 곳.


화개장터에 있는 안내판. 오른쪽 안내판에 <역마>에 나오는 구절이 인용돼 있다

화개장터에 있는 옥화네 주막은 3대에 걸쳐 역마살과 관련이 있다. 옥화의 엄마는 36년 전 남사당패와의 하룻밤으로 옥화를 낳게 되고 옥화는 떠돌이 중과 관계하여 아들 성기를 낳았다. 옥화는 성기가 역마살이 끼었다고 해서 열 살 때부터 절에 보내어 지내게 하는데 성기는 장날엔 절에서 내려와 책전을 편다. 어느날 늙은 체 장수가 열대여섯 살 먹은 딸을 주막에 맡겨 놓고 장사를 떠난다. 옥화는 성기가 가정을 이루면 떠돌지 않을까 싶어 성기와 체 장수 딸 계연이 마음이 맞기를 바라고 그들은 서로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체 장수는 36년 전 남사당을 꾸려 화개장터에 와 하룻밤을 놀고 갔던 자기 아버지이고 계연은 자기의 이복동생임을 알게 된다. 체 장수와 계연은 여수로 떠나고 성기는 갑작스런 이별로 식음을 전폐한다. 성기가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이자 옥화는 계연을 보낸 자기에게 원망이나 없으라고 성기에게 계연의 내력을 말해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성기는 기력을 회복하고는 엿판을 메고 계연이 떠난 구례 쪽 길을 등지고 하동 쪽으로 떠난다.


첫 문장에 제시된 세 갈래 길이 성기의 인생 앞에 놓여 있었다. 역마살을 없애기 위해서 지금까지 지내왔던 쌍계사로 가는 길, 계연이를 따라가 운명을 거역하는 구례 쪽 길, 운명에 순응해 떠돌이로 사는 하동 쪽 길. 성기는 세 번째 길을 선택했고 그 길로 들어서자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간다. 인간과 운명의 대결에서 인간이 운명에 순응함으로써 안식을 얻는 모습이다.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한 소설 <역마>(1948)는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미궁과 그곳으로 인간을 끌어들이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힘’에 대해 말하는 김동리(1913~1995) 문학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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