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떠난 느린 시간들(21화)
저녁에 고구마를 굽기 위해 다시 불을 지폈다. 어제의 경험 덕분에 오늘은 훨씬 수월했다. 숯은 남아 있었지만, 불을 붙이려면 마른 장작이 필요했다. 아빠는 숙소 주변을 천천히 거닐며 나무가지를 주워 오셨다. 나뭇가지들이 타오르며 금세 불길이 살아났고, 숯에도 불이 옮겨 붙었다. 호일에 고구마를 하나씩 정성스레 감싸 화로 속에 넣었다. 잔불에 은근히 익혀야 제맛이지만, 마음은 조급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을 보며 한껏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고구마를 넣었다.
저녁 식사는 숙소 호스트가 추천해 준 식당에서 주문하기로 했다. 직접 가서 주문한 뒤 숙소로 배달해달라고 이야기하기로 하고,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탔다. 해가 지기 시작한 이른 저녁, 공기는 시원했고 도로에는 바람결이 부드럽게 흘렀다.
식당에 도착하니, 직원 둘이 가게 앞 테이블에 앉아 한가롭게 쉬고 있었다. 메뉴판을 훑어보던 우리에게 한 직원이 다가와 자리를 안내했다. 배달이 가능한지 묻자, 직원은 주방 안의 사장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묻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는 답에 안심하고, 우리는 호스트의 추천 메뉴와 인터넷에서 맛있다고 평가받은 음식들을 골랐다.
주문을 마친 후 식당 후기를 다시 찾아보았다. “사장님이 정말 친절하다”는 글들이 줄줄이 나왔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직원들은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사람들, 자기가 먹은 음식 맛있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후기 쓰는 거 아닐까?”
아내는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 지나도 계산서를 주지 않기에, “이러다 그냥 우리가 기다리다가 음식을 들고 가라는 건가?” 하며 의아해했다. 직원은 TV를 보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계산기를 두드려 계산서를 가져왔다. 그런데 금액이 이상했다. 45만 동쯤 나와야 하는데, 24만 동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내가 계산이 잘못됐다고 말하자, 직원은 당황한 듯 핸드폰 계산기를 두 번이나 다시 두드린 끝에 실수를 인정했다. 그런데 또 하나, 주문한 반쎄오가 빠져 있었다. 내가 말하자 직원은 “아~” 하고 탄식하며 “Sorry, sorry!”를 반복했다. 그제서야 50만 동을 받고는 다시 TV 앞에 앉아 잔돈을 가져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저 알바생 ADHD 아니야?” 하고 농담 섞인 진단을 주고받았다. 둘 다 전문가이기도 하고, 나는 실제로 약을 복용하고 있으니 그 행동이 낯설지 않았다.
10분쯤 지났을까, 오토바이를 타고 부부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얼굴에 미소가 번진 두 사람은 우리를 향해 다정하게 인사했다. 알고 보니 사장 부부였다. 사장은 주문한 메뉴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며, 음식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레몬치킨은 중국식으로 할까, 베트남식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베트남식으로 만들었어요.”
나는 속으로 ‘중국식으로 했으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도 있었지만, 결국 베트남 현지에서 베트남식 요리를 먹는 것이 더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사장의 고민이 담긴 선택이니 더욱 기대가 컸다.
사장 아내는 정성스럽게 포장한 음식에 망고와 수박까지 곁들여 숙소로 배달해주었다. 따뜻한 마음이 담긴 선물처럼 느껴졌다.
포장을 열어보니 레몬치킨은 의외로 볼품없어 보였다. 양도 적어 보여 순간 실망했지만, 첫입을 베어 물자 생각이 바뀌었다. “이건 처음 먹어보는 맛인데… 정말 맛있다!” 엄마도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들도 하나둘 입을 가져다 댔다. 다만 예온이는 생긴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을 대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고구마 익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호일을 벗기자 약간의 탄 자국이 보였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더 먹음직스러웠다. 가족 모두 장작불 주위에 둘러앉아 고구마를 호호 불며 나눠 먹었다. 8개를 구웠는데, 어느새 하나도 남지 않고 깔끔히 사라졌다.
“정말 맛있다.”
“이렇게 먹으니 더 좋네.”
엄마, 아빠도 연신 감탄하셨고, 아내도 고요한 미소를 머금은 채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은 장작불을 바라보며 까르르 웃었고, 그 웃음 소리마저도 바닷바람에 실려 잔잔하게 퍼졌다.
그 순간,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생각이 스쳤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냥 여기서 이렇게 살고 싶다.’
장작불에서 일렁이는 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고, 머릿속도 편안해졌다. 바다 바람, 따뜻한 불빛, 사랑하는 가족의 웃음소리…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싶었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따뜻한 장작불이 어우러진 저녁, 그 순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로웠다. 고요한 불빛을 바라보며 마음 깊은 곳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의 복잡했던 생각들은 잠시 사라지고, 오롯이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