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너무 다른 예술 시장
달라도 너무 다른 예술 시장
개인 취향에 의해 결정되는 예술 소비
예전에 예술경영지원센터를 통해 브랜딩 컨설팅을 받게 되었는데 우리를 담당해주신 컨설턴트님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엘레멘트(LMNT)의 최장순 대표님이었어. (지금도 간혹 대표님 인스타를 염탐하면서 참 어마어마한 분이다! 라는 생각도 하지만, 마지막으로 말씀 나누면서 다음에는 같이 술 마시기로 했는데 그것도 벌써 6년이 지났네~라는 생각도 드네!) 아무튼 최 대표님께서 우리 엘디프의 당시 아이덴티티를 관통해서 보셨다는 것을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느껴. 유시민 전 장관이 본인을 '지식소매상'으로 소개하던 시절이었는데, 그것처럼 엘디프를 '예술소매상'이라는 단어로 홍보하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하셨었거든. 예술공정거래, 예술소매상, 예술기획사... 우리를 표현하는 모든 단어에 예술이 붙다 보니 엘디프를 가장 색다르게 만드는 것은 '예술공정거래'라는 단어에 집중하자고 결론이 나긴 했지만, '소매상'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어. 위에서 말한 여러 이유로 소량 생산을 기반으로 한 B2C 매출 비중이 높은 구조를 갖고 있지.
아무래도 엘디프가 예술 시장, 그것도 시각 예술 분야에 몸담고 있어서 더 그런 것 같아. 시각 예술이라는 컨텐츠가 가진 생래적인 특성과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표현 방식 덕분에 소매업의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는거지. 한 편에서는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만든 굿즈들이 나오자마자 완판 행진을 이어가고 그 작가의 원화는 없어서 못 팔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 예술 소비는 남이 좋다고 해서 나도 동요하는 분야는 아니거든. 각 콜렉터의 개인적 취향을 많이 타는 분야다 보니까 더욱 소매의 구조를 띄게 되는 것이지. 다양한 갤러리들이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거야. 사실 시각 예술 시장에 있는 정말 많은 기업들은 '예술소매상'인 거지. 그 말인 즉슨, 예술 시장은 소비자가 여러 세그먼트로 엄청 세세하게 분절되어 있다는 뜻이야. 취향이 너무 다양해서 대표 상품이랄 게 없어. 소비자 타겟을 설정하기가 어려워. 시장 자체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 알기가 어려워.
예술 시장에 대한 정의가 어렵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되게 Risky 하게 느껴지겠지?
꼭 필요하지 않은, 절대적 사치재
툭 까놓고 이야기하면, 예술은 그냥 사치재야. "ㅇㅇ이 밥 먹여주냐?"라는 질문에 예술을 대입해봐. 예술품 산다고 의식주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그건 인정해야 돼. 그럼 한 다리 더 건너서, 필수재에 예술을 얹는 아트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제품이 탄생했다고 쳐 봐. 아트콜라보 그릇, 아트콜라보 아파트, 아트콜라보 자켓. 협업에 들어가는 비용과 저작권료 등등... 같은 재질의 같은 상품보다 더 비싼 가격을 매기는 건 당연하지. 그냥 예술이 끼어 들어가면 비싸져. 사치재라서 그냥 비싸, 이유 없어.
반면 요즘 투자 잘 받거나 인수된 기업들은 필수재 그 자체로 사업을 하지. 컬리와 배민은 음식, 호갱노노는 부동산, 런드리고는 세탁. 다 의식주랑 관련있어. 스타트업만 그런 거 아니고 돈 잘 버는 대기업들도 마찬가지야. 이제는 내 몸과 같은 핸드폰, 자동차, 대형마트, 포털사이트... 가격 경쟁을 할 수 있고, 없어서는 안 될 상품들이야. 아직까지 예술 스타트업들의 사업 모델은 앞서 말한 기업들과는 사업의 결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투자의 대상이 되려면 기업들에게 많은 변화가 있어야 할 거야. 그 과도기적 과정에서 예술 콘텐츠와 인테리어 소품을 결합해서 나오는 제품들이 많아지는 것이고, 엘디프도 바로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거겠지.
역설적으로, 그래서 예술 스타트업이 투자 받았다 하면 그 금액이 얼마든 그 회사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거라고 봐야 돼! 또한 그렇기 때문에 엘디프도 융투에 대해 유보적으로 보게 되는 거야. 기왕 투자를 받을 것이라면 분절된 시장의 촘촘한 타겟을 대상으로 하는 지금이 아닌, 광범위한 대중을 상대로 큰 사업을 일으켜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받고 싶은 마음인 것이지.
가방은 에르메스, 아이돌은 에스엠, 그림은 에르디프.
개인 취향을 기반한 소비 행태로 인해 예술 시장은 정의가 어렵다는 점 + 다품종 소량생산의 소매업의 성격을 띠는 것 + 예술이 사치재라는 점. 이 세 가지를 적고 나니 (첫 번째 조건을 제외하고 생각했을 때) 결국 브랜드 가치가 예술 기업의 가치가 될 것이고, 결론적으로 예술 기업은 명품 브랜드와 같은 전략을 취해야 하는 것인가? 라는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네. 현재까지는 그랬던 것 같아. 비싸면 비쌀 수록 더 높은 비딩값으로 낙찰이 되고, 유명하면 유명할 수록 콜렉터들이 오픈런까지 하면서 작품을 소장하니까. 우리들의 큰 형님 서울옥션이 하는 것처럼 말야.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문화 소양이 축적됨에 따라 더 일상적으로 예술을 접할 수 있는 저변이 마련되었고, 그래서 예술 스타트업들은 합리적 가격이면서도 예술 콘텐츠가 접목되어서 더 소장가치 있는 일반 소비재에 집중하는 것 같아. 엘디프도 그러고 있고. 소수만 향유하는 폐쇄적 시장에 대한 반항심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돈이 없어서 명품 브랜드를 만들기가 어려워서일까? 나는 시각 예술 상품도 문화예술 분야의 한 섹터로서 엔터테인먼트 사업처럼 대중을 매료시키는 대표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환청을 가끔 들어 ㅎㅎㅎㅎ 누구나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아이돌을 기획해 내는 수만이 오빠네 회사처럼 말야. 시간이 지나봐야 무엇이 맞았는지를 알 수 있게 될테니 더 고민하기 보다는 여기서 글을 맺어볼게.
원래 우리 엘디프 내부의 건방진 캐치프레이즈는, "가방은 에르메스, 가전은 엘지, 그림은 엘디프"
오늘만큼은 스엠이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가져온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는 동시에 예술 기업은 명품 브랜드가 되어야하는가를 고민했던 하루로 기록하기 위해 약간 바꿔서 외쳐볼게.
가방은 에르메스, 아이돌은 에스엠, 그림은 에르디프!
차한별 - Across this divide
덕업일치 Issue No.4의 커버로 선보인 작품은 엘디프 아트레이블L 소속 차한별 작가의 <Across this divide>이다. 차 작가와의 인연은 서울일러스트레이션페어에서 시작된 것 같다. 정중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꼼꼼한 이메일, 좋은 인연이 될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디지털 드로잉으로 원라인 드로잉을 선보이다가 현재는 린넨 천 위에 자수를 두는 형태로 원라인 드로잉의 원화 작업을 많이 하는 작가는 하나의 선이 만들어내는, 때로는 극단적으로 단순하다가도 가끔 극도로 복잡한 세계를 보여주는 넓은 스펙트럼으로 늘 놀라움을 준다. 차 작가가 엘디프와 계약한 작품 중 나 개인적으로는 가장 시선을 오래 두었던 이 작품 <Across this divide>은 바로 그 '복잡함'을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번 덕업일치를 적어내려가면서 이 작품이 다양한 취향을 가진 소비자들이 만들어내는 예술 시장의 다이나믹함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우후죽순 생겨나는 예술 스타트업들의 실루엣이 절묘하게 겹쳐져 하나의 새로운 아름다운 생태계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는, 이 시장은 단순한 경쟁시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나친 낙관주의자로서의 마음으로 선정해보았다.
작가 노트 - Across this divide, 180x160cm, 2019
One-line drawing 으로 그린 ‘Across this divide’시리즈 중 한 점입니다. ‘Non-existent’의 하위 시리즈라고도 볼 수 있는 시리즈로 ‘Non-existent’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물의 모호한 표정과 몸짓, 알 수 없게 이어지는 선들, 최대한 배제된 감정의 표현은 보는 이에게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줍니다. ‘Non-existent’시리즈와 가장 차별화되는 점이자 ‘Across this divide’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은 많은 인물 모습의 등장입니다. 굉장히 많은 얼굴과 많은 몸이 한 선으로 뒤엉켜 있는 모습은 기묘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한 인물의 여러 자아로 볼 수도 있으며, 여러 인물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