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결혼 2년 차 아내의 이야기
결혼할 사람은 보자마자 "이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딱 온다던데 나는 그런 특별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밥을 먹고 카페를 갔을 때 아메리카노도 라떼도 아닌 딸기 우유를 시키길래 참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커피를 못 마시는 사람이라는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첫 소개팅 후 세 번째 만남에서 남편은 자신의 동네로 나를 불렀다. 자주 간다는 동네 고기구이 집에서 소고기를 구워주며 호감을 적극 표시했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얼굴 빨개지는 아이」라는 그림책과 편지를 주었다. 편지는 두 번째 만남 이후 이른 새벽잠에서 깨 나를 생각하며 적은 것이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잘 모아 정리한 글이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이 사람과 결혼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 남자와의 연애시절 가장 치열하게 대립했던 부분은 나의 외로움과 그 남자의 혼자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처음엔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것 같이 굴던 그 남자. 연애 초기가 지나자 그는 자신의 시간과 공간에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에서 그는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꼈고 외로웠다. 다소 굴곡이 있던 연애였음에도 불구하고 결혼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결혼하면 나아지겠지란 생각 때문이었다. 같은 공간에 붙어있을 수밖에 없으니 나는 덜 외로울 수 있다고 덜 싸우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피 터지는 부부싸움을 해야 했다. 남편은 자율 출퇴근이 가능한 탓에 내가 출근할 땐 자고 있었고, 야근이 잦아 내가 잠에 들 때쯤이 돼서야 집에 오곤 했다. 나는 여섯 시쯤 집에 도착해 남편이 올 때까지 분리불안에 고통스러워하는 강아지처럼 낑낑댔다. 밥을 혼자 먹는 것도 너무 싫었고, 남편이 보고 싶어 시계만 쳐다보고 있는 시간은 지옥 같았다.
같이 있어서 더 외로웠다.
많이 싸웠다. 크고 작은 싸움에 매일매일이 다이내믹했다. 우리는 결혼 1주년을 기점으로 전의를 상실하기라도 한 듯 휴전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신기하게 큰 싸움은 없다. 싸움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살면서 싸움에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다 써버린지도 모른다. 어떤 방패도 뚫을 것 같있던 나의 창은 무뎌지고 어떤 창도 막을 것 같았던 그의 방패는 적당히 허술해진 것 같다. 무튼, 다툼이 줄어드니 비로소 남편의 좋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 좋은 점들은 계속 있어왔던 것들인데 그것들을 내가 다시 봐주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내가 생각하는 남편과 결혼해서 좋은 점은 이렇다.
남편은 섬세하고 꼼꼼하다.
나는 대충 빨리해놓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다시 하는 타입이다. 남편은 결심을 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막상 일이 시작되면 빠진 것 없이 잘 챙긴다. 나는 10분 만에 준비를 하고 남편은 30분이 걸린다. 나는 늘 뭔가를 빠뜨리고 나가고 그 빠뜨린 물건은 남편의 가방에 들어있곤 하다. 나는 남편이 가끔은 답답하고 남편은 종종 내가 버거울 수 있지만 우리는 같이 살아서 좋다. 나는 엔진이 되고 남편은 핸들이 된다. 나는 액셀을 밟고 남편은 브레이크를 밟아준다.
남편은 일을 사랑한다.
남편한테 이럴 거면 결혼하지 말고 일만 하지 그랬냐고 화를 낸 적이 많다. 남편은 내 주위 어느 사람보다도 자신의 직장과 일에 애착이 크다. 나도 사실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연차가 쌓이며 대충 해도 괜찮다는 나름의 요행수가 생겼다. 하지만 남편은 나보다 직장생활을 5년이나 더 했음에도 어느 신입보다 더한 성실함을 보인다. 그런 남편에게 일과 나 중 하나만 선택하라며 일을 인격화하고 질투하기까지 했다니. 남편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지금, 일을 사랑하는 남편을 나는 존중한다. 오래도록 일하며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남편은 나를 안정적이게 해 준다.
남편은 출근시간이 1시간이 빠른 내가 집을 나설 때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현관문까지 나와서 배웅해준다. 그리고 가끔 내가 늦잠을 잔 날이면 지하주차장까지 뛰어가 현관 바로 앞에 차를 대기시켜주기도 한다. 잠에 빨리 못 드는 날이면 손을 잡고 잠에 들 때까지 기다려준다. 물론 처음부터 그가 이런 행동을 했던 건 아니다. 신혼 초에 그는 내가 출근할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는 늦은 퇴근 후엔 피곤하다고 말도 없이 혼자 자버리곤 했다. 우리 둘 다 결혼은 처음이라 어떻게 하는 게 상대를 배려하는 것인지 싸우면서 빡세게 배웠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현재 나는 그와 함께하는 결혼 생활에서 큰 안정감을 얻는다. 나를 잘 알고, 보듬어주는 사람이 늘 옆에 있다는 느낌은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큰 에너지가 된다.
내가 쓴 글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읽힐 수도 있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남편이 내 글을 읽는다는 것은 더더욱 부끄럽다.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함께 글을 써본다는 것이 기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결혼해서 좋은 점'에 '함께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도 포함이 될 것 같다. 이 글쓰기를 통해 우리 부부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기를-
안녕하세요, 그여자입니다. ‘그남자’로 활동하는 남편과 연애와 결혼, 부부생활을 주제로 매주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읽는 아내들이 행복했으면 합니다. 남편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 그남자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