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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Oct 29. 2022

마흔에도 여전히 애도(mourning) 작업 중.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애도 5단계를 지나며... 




"깊은 슬픔(grief)은 결코 작아지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비통함을 감싸 안으며 점점 더 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상실의 언어, 샤샤 베이츠)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애도 작업 5단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터다. 아빠가 죽고 난 후의 40년의 삶을 생각해보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이야기한 애도 반응이 여러 번 반복된 형태로, 하지만 그 모양이나 크기는 다른 형태로 매번 찾아왔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이야기한 애도 작업의 5단계는 ‘부정(Denial)-분노(Anger)-타협(Bargaining)-우울(Depression)-수용(Acceptance)’이다. 이는 다섯 단계로 나와 있지만 단계보다는 과정으로 보는 게 더 맞다. 이 과정은 순차적으로 지나간다기보다 여러 번 반복적으로 언제든 후퇴하여 또 다른 슬픔이나 압도적인 감정에 휩쓸리기도 한다.      


부정(Denial)

 처음 아빠의 죽음에 대해 들었을 때만 해도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첫 글에 썼듯이, 아빠는 잠시 일을 하기 위해 해외로 가신 거라고 부인했다. 외할머니가 잘못 알고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좀 더 커서 아빠가 죽었더라면, 그래서 장례식에 참여했다면 좀 더 빨리 부인의 과정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분노(Anger)

엎치락 뒤치락 분노의 과정은 엄청났다. 내가 겪는 가난, 외할머니 집에 맡겨짐. 서럽고 슬픈 일이 시작은 결국 아빠의 죽음이라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내 안에는 분노가 거칠게 일어났다. 

분노의 대상은 주로 ‘하나님’이었다. 당신이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왜 아빠를 이렇게나 빨리 죽게 했는지. 당신의 정말 자비의 하나님이라면 왜 나에게 이런 힘듦을 겪게 하는지. 따져 물었다. 따져 묻다가도 죄책감이 들면, 또 다른 벌이 내려질까 두려워했다. 

끓어오르는 분노는 좋은 세상을 좀 더 누리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 나보다 더 억울할 ‘아빠’를 향하기도 했다. 당신이 세상을 일찍 떠나 내가 누리지 못한 것이 참 많노라고. 말도 안 되는 성을 부렸다.    

 

타협(Bargaining)

아빠가 살아 돌아온다면, 다시 삶을 돌이킬 수 있다면,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하나님께 타협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아니면 내게 ‘아빠’같이 든든한 존재, 기댈 수 있는 존재를 보내달라고 다른 대상을 찾아 헤매었다. 생각해보면, 내겐 아빠와 함께할 추억조차 없었기에 타협 과정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우울(Depression)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너무 슬프다. 죽음이 뭔지...

나도 죽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특히 진짜 아빠가 보고 싶을 때... 세상은 정말 살기 힘들다' (1994. 2. 24. 일기)’     


나에겐 우울의 단계가 가장 길었다. 잘 지내다가도 툭하면 슬픔이 찾아와 죽고 싶단 생각을 했다. 아빠가 있는 곳은 어떤 곳일까? 상상하면서..... 비비고 뒹굴 언덕이 필요할 때, 스물일곱, 혼주석의 빈자리를 볼 때, 아이들에게 ‘할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없을 때. 시도 때도 없이 슬펐다. 슬픔의 시간이 참 길었다.    

  

수용(Acceptance)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이제는 아빠의 죽음에, 빈자리에 익숙해져 간다. 어쩔 수 있으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인데. 내 손을 이미 떠난 일인데. 없는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익숙해졌다.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그를 그리워하기로 했다.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슬픔은 옅어져 갔다. 아이가 10개월이 됐을 때, 내게도 같은 불행이 찾아올까 불안해하기도 하고(한 언니는 엄마가 42세에 돌아가셨는데 자기 나이 42세가 다가올 때 무수히도 불안했단다.) 우여곡절의 시간이 잘 지나가면서 소용돌이치던 애도의 감정들이, 상실의 언어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내 마음엔 늘 아빠가 존재한다. 

무덤에 묻힌 존재지만 내 가슴 안엔 살아 숨 쉰다

상실의 슬픔 속에, 애도의 순간에 놓인 그대여. 

다가오는 수많은 감정과 언어들을 놓치지 않길. 


"깊은 슬픔(grief)은 결코 작아지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비통함을 감싸 안으며 점점 더 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상실의 언어, 샤샤 베이츠)




"애도할 때 세상은 빈곤해지고 텅 비게 된다(프로이트,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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