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돼" 중에서
분명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9월의 오후,
그녀의 집 근처 공원 숲길을 나란히 걸었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흘러내리는 사이로, 그녀의 그림자가 내 옆에 다정하게 포개졌다. 걸음걸이를 맞춰주는 그녀의 발끝에서 나는 알 수 없는 평온과 안도를 느꼈다.
며칠 뒤,
그녀의 SNS에 글이 올라왔다.
그날의 그 숲길 사진과 함께 ‘혼자 걸었던 날’이라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녀의 외로움이 화면 너머로 천천히 번져왔다.
우리는 엇갈리고 있었다.
그날,
나와 함께 걸었던 그날.
그녀는 나와 함께 걷고 있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에 휴대폰을 끄고, 어둡게 변한 화면을 바라보며 지나간 시간을 되짚었다.
‘그 어디쯤에서부터 혼자였을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순간, 이미 나는 혼자였다.
외로움은,
함께였다고 믿은 기억이, 실은 혼자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 시작되었다.
함께였다고 믿은 시간들은 내 안에서만 맴돌던 서사였고, 그녀가 머물렀다고 여긴 순간들은, 붙잡고 싶었던 내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녀를 마주할 수 있을까.
아니, 아무리 되돌아간다 해도 그녀는 다른 계절의 길목에 서 있을 것 같았다.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내가 어디서부터 혼자였는지를 되짚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이 그립다기보다, 나를 놓치고 살아온 시간이 더 그리웠다.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흔들리는 나를 붙잡기 위해. 그녀에게 위임했던 내 존재를 되찾기 위해...
숨이 멎을 듯한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혼자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녀가 없는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지만, 나는 여전히 일말의 기대를 품고, 남겨진 시간 속에서 말없이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완고한 그녀의 침묵은 점차 기대가 아닌 실망으로 변해갔다.
그곳은 더 이상 내가 바란다고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내 안을 스쳐간 하나의 우연, 그러나 쉽게 지워지지는 않는, 지나간 계절 속의 장면이었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누구의 걸음에도 맞추지 않고
누구도 기다리지 않으며
누구도 믿지 않으며.
사랑은,
누군가를 따라 걷는 일이 아니라, 혼자 걸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내 존재를 확인받으려는 일이 아니라, 내가 나로 온전히 살아낼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그녀를 회상하지 않는다.
그녀를 알아채지도, 품어내지도 못한 나를 기억할 뿐이다.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보다,
그 마음이 언제부터 멀어지고 있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더 서늘했다.
계절이 바뀌고 나서야 알았다.
내 안에 가장 깊이 남은 상처는,
그녀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언제부터 혼자였는지도 모른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나를 떠나 있었다.
잠시 멈춘 그 자리에서,
나는, 어디론가 향해야 할
내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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