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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산박 Jul 09. 2022

청천 하늘에 잔별도 많고

시리도록 그립다


아버지.

외모에서 나타나는 겉모습은 강하고 특히 아들들에겐 엄격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더듬어보면 너무 여렸고 약했으며, 당시 모든 부모가 그러했듯 가난으로 인한 슬픔의 트라우마가 마음 깊숙하게 숨어 있어, 늘 어떻게든 잘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인생을 살아오신 것 같다. 아버지는 그런 세상을 살아오셔서 그런지 당신 아들들보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그리고 동생들에 대한 끔찍한 사랑을 품고 있었고, 그렇다고 그런 내밀한 마음을 어머니나 자식들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으셨다. 그래서 당신 앞서 돌아가신 작은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슬퍼하시다 결국 당신도 몇 개월 뒤에 그 길로 가셨다.  


가을이 돌아오자 벼가 노랗게 익어 추수를 앞둔 들판을 보시고, 당시 중풍으로 벼를 베시다 쓰러진 할아버지를 회상하는 글을  남기셨다. 내 어린 시절 어느 가을날. 아버지는 쓰러진 할아버지를 등에 업고 급히 안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이불 위에 할아버지를 누이시고 우시면서 '아버님, 아버님' 하고 부르셨다. 할아버지 68세 되는 해였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며칠 앓으시다 가난한 세상을 자식 손자들에게 물려주고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 모습, 그 슬픈 이야기를 아버지는 이렇게 일기에 남기셨다.        


   

가을 일이 한창일 때 나는 지켜보았다. 호흡이 급하여 열이 불같이 오르고, 정신이 왔다 갔다 하신다. 숨을 급하게 쉬실 때는 정신이 없다. 조금 누그러지면 눈을 뜨시고 나를 바라보시면서 눈에 이슬이 맺힌다. 이제 나는 가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드시는 모양이다. 나는 옆에서 칠성 주문을 소리 내어 읽었다. 아버님 늘 외어 낭독하시던 주문이기 때문에 칠성 주문을 들으시고 위안이 좀 되시라고 소리 내어 여러 번 반복하여 외었다. 그러나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가셨다. 몰아쉬는 숨이 덜커덩하면서 멈췄다. 나는 천지가 아득했다. 비로소 느낀 것이 이제 영원한 이별, 다시 볼 수 없는 이별 이것이 너무너무 허무했다. 이 마음을 좀 더 몇 년 전에 이 현상을 감지하고 영원한 이별이라는 것을 느꼈으면 효도를 다 했을 것을, 나는 항상 같이 계시고 모실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이별, 다시 볼 수 없는 이별이 한없이 슬펐다. 그런데 내가 현재 나이 83세를 살았다. 아버님보다 15년을 더 살았고 15년이면 너무 많이 살았다. 그때 외웠던 칠성 주문을 다 잊었다. 첫머리 부분이 ‘칠성여래 대제군 북두구진 중천대신 상조금궐 하부골윤...’거기까지만 생각난다. 중간중간 몇몇 글자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끝부분이 존제급급 여률영이다. 생각난 대로 중간에 써넣어야겠다. 

- 날짜 미상, 어느 해 가을          



일기엔 날짜를 적어놓진 않았지만, 아버지 연세 83세 때이니 2017년 가을로 추정된다.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의 모습과 그 앞에서 할아버지의 불규칙한 호흡과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칠성 주문을 소리 내어 외우신 것을 회상하고 있다. 지금 인터넷 검색해 보니 중국 도교의 칠성주, 대순진리회의 칠성주문이라고 나오는데 주문의 시작 부분은 아버지 기억이 정확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어떤 종교를 숭배했는지는 내 기억에 하나도 없다. 아버지가 어렸을 적 아버지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채 할아버지에게 그 주문을 배우셨고, 세상 살면서 위험한 일을 닥치거나 힘들었을 때 막연하게 그 주문에 의지하여 험한 세상을 살아내신 것 같다.

     

지금이라면 할아버지를 바로 병원에 모시고 갔을 테지만, 가난한 그 시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시절에 중풍에 걸려 죽음 앞에 있는 할아버지 곁에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막연히 그 주문을 외우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아픔과 안타까움 그리고 슬픔과 효심이 고스란히 내게도 전해져 온다.  

    


할아버지는 아들이 없던 고을 참봉의 서자로 태어나 혹독한 교육을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본부인의 시기로 증조할머니와 함께 한 푼도 물려받지 못한 채 쫓겨나게 되었고 평생 가난을 면치 못했다. 할아버지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술로 세월을 보내셨던 것 같고 할머니를 만나 5남매를 두셨다. 그런 할아버지를 잘 아셨던 아버지는 가난한 시절을 보내면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 고통과 슬픔을 오롯이 짊어져야 하는 장남의 숙명을 안고 그 한 많은 세월을 넘어야 했다.        


    

어머님께서는 젊었을 시 고생이 너무 많으셨다. 우선 빈곤을 면치 못하여 먹을 양식이 떨어져 설을 쇠고 나면 굶기를 밥 먹듯이 하였다. 더구나 우리 5남매를 낳으셔, 아들딸만 생각하셔, 더욱더 굶주리셨다. 가장인 남편은 주막에서 매일 장주(長酒) 하시고 놀음으로 세월을 보냈으니 구차한 가정이 더더욱 살기가 형편없이 곤란하셨다.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사셨으나 실망한 빛은 없어 손자들 키우는데 큰 행복감을 가지셨고, 살림살이가 차차 나아져 논밭을 사고 호구지책을 면케 되었다. 그러다 큰아들이 집을 지었다. ㅇㅇ면에서 제일 먼저 신식 주택 스라브 집을 지었다. 그러나 태도는 변함없고 표정은 일관이시다. 전주에서 큰손자 둘째 손자들 밥을 해주셨다. 그러시다 집으로 오셨다. 몸이 불편하고 기침을 많이 하셨다. 결국, 결핵성 질환이 낫지 않아 한 많은 세상을 등지셨다. - 어머님을 회상하며 (날짜 미상)          



나로서 할머니는 사랑 그 자체셨다. 부모님보다도 더 가깝고 정이 많은 분이셨다. 내 어린 시절의 절대적인 사랑은 바로 할머니였다. 할머니만 곁에 있으면 세상이 그냥 포근했다. 가을이 지나고 이제 막 겨울이 찬바람을 몰고 오는 어느 저녁 날, 상을 펴놓고 공부하고 있는 내게 할머니는 슬며시 다가와 잘 익은 홍시를 허리춤 뒤에서 꺼내 내게 내밀고는 빙그레 웃고 나가셨다. 그런 일은 종종 있었고 홍시의 그 맛보다 할머니의 사랑이 너무 진하게 느껴졌다. 그런 할머니. 아버지에겐 또 따른 희생의 어머니셨다. 술에 빠져 가정을 등한시한 남편을 늘 찾아 나서야 했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살아내야 했던 할머니는 아버지의 눈에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불쌍한 어머니였다.          



마당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

그것은 무슨 민요 같기도 했고 당시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진도인지 경기 아리랑인지 아리랑 민요였다. 마당에서 깨를 털며 그 한이 섞인 민요를 읊조리면 난 방 안에서 책을 보다 멍하니 할머니를 내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는 푸른 하늘이 마당에 시리도록 슬프게 떨어지는 것 같았고, 할머니의 가냘픈 노랫소리는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아프게 흔들었다.     


‘청천 하늘에 잔별도 많고 이내 가슴에 수심도 많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중학생 시절. 그때 그 노래를 듣고는 마음이 괜히 아파 조용히 밖으로 나가 할머니 모르게 등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뒤에서 할머니를 껴안으면 할머니는,      

‘오, 내 새끼…’     


“할머니, 그 노래가 그렇게 좋아? 난 슬픈데?”

“………”     


그때 그 시절, 내 사랑하는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또 그 시절을 회상하는 아버지도 시리도록 그리운 오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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