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이십대 후반경대학교수가 되었다. 외국 유학도 흔해지고 박사학위 취득생이 많은 요즘에는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는 게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지만, 그가 젊었을 때는 그리 어렵지 않았나 보다.
한국전쟁 후, 피난길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는 미국 유학을 갔다. 다들 어렵게 살 때 유학까지 간 걸 보면 집안에 물려받는 재산이 있었던 걸로 추측된다. 아니면 무리를 해서라도 유학을 다녀오면 바로 대학교수가 될 수 있었기에, 장래 직업에 대한 남다른 혜안이 있었거나.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계획대로 어느 사립대학에 교수로 취업하여 정년 퇴직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교수라고 하면 쉼 없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줄곧 연구와 공부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가끔 죽은 사람의 뒤처리, 즉 염을 해주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나이가 드니 장례식장 갈 일이 빈번해진다. 친구의 부모님은 물론, 함께 일했던 동료와 선배의부고도 날아온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될 나이도 되었거늘, 그러나 나는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을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다.
시댁 친정의 부모님 네 분이 다 돌아가셨고, 그중 시어머님의 임종을 지키기는 했지만 사망 이후 입관 전까지 시신을 정돈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사람이 죽으면 척추뼈가 내려앉는다더라, 몸에 있는 배설물을 모두 쏟아낸다더라, 하는 '썰'들을 들었을 뿐.
그 썰들이 얼마큼 사실인지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입관 전에 시신을 정결하게 닦는 일이 아주 힘든 노동일 거라고는 짐작한다. 더욱이 오래 앓다가 돌아가셨다든지, 사고로 시신이 훼손되었다든지 한다면 시신에 손을 대는 자체가 꺼려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얼마 전에 존경하는 수녀님이 돌아가셔서 수녀원에 다녀왔다. 전에도 그 수녀원에서 초상이 나면 몇 번 참석하곤 했는데, 그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부고를 전한 한 수녀님이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수녀님이 돌아가시면 우리 수녀님들이 염도 하고, 입관도 하고, 출관도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면 법에 걸린다네요. 어쩔 수 없이 수녀님들이 임종하시면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거기에서 입관까지 하고 수녀원에는 장례미사 때나 모시고 와요. 그러고 나서 발인하죠."
살면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독신 수도자의 몸. 이미 숨이 떠난 후에 그 몸은 흙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동료, 후배 수녀들에 의해 씻기고 준비되는 과정이 훨씬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몇 구의 시신을 수습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왜 그 일을 하고 다녔는지 모른다. 지금 물어볼 수도 없다. 그의 몸 역시 자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어느 누군가의 손에 씻겨졌고, 수의가 입혀졌고, 관에 뉘어졌고, 한 줌 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디에서 어떻게 마지막 숨을 쉴지, 숨이 떠난 몸이 누구에 의해 수습될지 그 역시 몰랐을 터. 그러니 자신이 똑같이 보상받자고 그 험한 일을 했던 건 아닐 테다.
코로나로 조촐하게 치러진 장례식에서 미사를 집전해 준 사제가 말했다.
"교수님이 인간적인 허물이 많을지라도 제게는 내내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수십 년 전, 제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굉장히 꼼꼼하고 정성껏 염을 해주셨거든요."
백이면 백에게 다 좋은 사람일 수 없다. 누구에게는 좋은 사람이 또 다른 누구에게는 원수가 될 수도 있고, 어제는 착했던 사람이 내일은 악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은 사람, 혹은 주검 곁에 서 있는 사람에게 주는 도움은 그 행동의 크기, 그 행위의 지향을 너머 훨씬 더 크고 강한 무게로 남는다. 그가 대학교수로서 살아온 것보다 염사로서 남긴 행동이 내게는 더 존경스럽게 기억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