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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Apr 11. 2024

대학교수의 부캐는 염사였으니

그는 이십대 후반경 대학교수가 되었다. 외국 유학도 흔해지고 박사학위 취득생이 많은 요즘에는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는 하늘의 따기만큼이나 어렵다지만, 그가 젊었을 때는 그리 어렵지 않았나 보다.


한국전쟁 후, 피난길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는 미국 유학을 갔다. 다들 어렵게 살 때 유학까지 간 걸 보면 집안에 물려받는 재산이 있었던 걸로 추측된다. 아니면 무리를 해서라도 유학을 다녀오면 바로 대학교수가 될 수 있었기에, 장래 직업에 대한 남다른 혜안이 있었거나.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계획대로 어느 사립대학에 교수로 취업하여 정년 퇴직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교수라고 하면 쉼 없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줄곧 연구와 공부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가끔 죽은 사람의 뒤처리, 즉 염을 해주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나이가 드니 장례식장 갈 일이 빈번해진다. 친구의 부모님은 물론, 함께 일했던 동료와 선배의 부고도  날아온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될 나이도 되었거늘, 그러나 나는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을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다.


시댁 친정의 부모님 네 분이 다 돌아가셨고, 그중 시어머님의 임종을 지키기는 했지만 사망 이후 입관 전까지 시신을 정돈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사람이 죽으면 척추뼈가 내려앉는다더라, 몸에 있는 배설물을 모두 쏟아낸다더라, 하는 '썰'들을 들었을 뿐.

 썰들이 얼마큼 사실인지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입관 전에 시신을 정결하게 닦는 일이 아주 힘든 노동일 거라고는 짐작한다. 더욱이 오래 앓다가 돌아가셨다든지, 사고로 시신이 훼손되었다든지 한다면 시신에 손을 대는 자체가 꺼려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얼마 전에 존경하는 수녀님이 돌아가셔서 수녀원에 다녀왔다. 전에도 그 수녀원에서 초상이 나면 몇 번 참석하곤 했는데, 그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부고를 전한 한 수녀님이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수녀님이 돌아가시면 우리 수녀님들이 염도 하고, 입관도 하고, 출관도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면 법에 걸린다네요. 어쩔 수 없이 수녀님들이 임종하시면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거기에서 입관까지 하고 수녀원에는 장례미사 때나 모시고 와요. 그러나서 발인하죠."


살면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독신 수도자의 몸. 이미 숨이 떠난 후에 그 몸은 흙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동료, 후배 수녀들에 의해 씻기고 준비되는 과정이 훨씬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몇 구의 시신을 수습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왜 그 일을 하고 다녔는지 모른다. 지금 물어볼 수도 없다. 그의 몸 역시 자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어느 누군가의 손에 씻겨졌고, 수의가 입혀졌고, 관에 뉘어졌고, 한 줌 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디에서 어떻게 마지막 숨을 쉴지, 숨이 떠난 몸이 누구에 의해 수습될지 그 역시 몰랐을 터. 그러니 자신이 똑같이 보상받자고 그 험한 일을 했던 건 아닐 테다.


코로나로 조촐하게 치러진 장례식에서 미사를 집전해 준 사제가 말했다.

"교수님이 인간적인 허물이 많을지라도 제게는 내내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수십 년 전, 제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굉장히 꼼꼼하고 정성껏 염을 해주셨거든요."


백이면 백에게 다 좋은 사람일 수 없다. 누구에게는 좋은 사람이 또 다른 누구에게는 원수가 될 수도 있고, 어제는 착했던 사람이 내일은 악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은 사람, 혹은 주검 곁에 서 있는 사람에게 는 도움은 그 행동의 크기, 그 행위의 지향을 너머 훨씬 더 크고 강한 무게로 남는다. 그가 대학교수로서 살아온 것보다 염사로서 남긴 행동이 내게는 더 존경스럽게 기억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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