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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수 May 09. 2024

나는 나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기여합니다. #기여 #행복 #사명 #자존감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이유 없이 아이에게 화를 냅니다. 온갖 짜증을 아이에게 풀고 있는 바닥으로 주저앉은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고 여겨지면 나는 이렇게 내내 엄마를 기다리며 행복했을 아이에게 비수를 꽂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었네요. 엄마는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돌아와 늘 엄마 없는 빈 집이었습니다. 미안하다고 해놓고, 돌아서서 나는 아이에게 짜증을 부리고 있었어요. 못난 그 시절이 후회됩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했어요.'

그때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했어요. 교실에서 말썽 부리는 아이 때문에 민원 전화를 받아야 했고, 명품으로 포인트를 준 남편 잘 나가는 옆반 선생님은 늘 학교에서 인기만점이었습니다. 삼삼오오 모여 수다로 스트레스를 좀 풀어볼라 치면 남편자랑 자식자랑 부모가 물려준 집과 땅자랑까지 내가 끼어들 틈은 어디에도 없어 그저 입풀칠하고 경청만 해야 했습니다. 세상에 나만 가진 게 없고, 세상에 나만 버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했고, 한편 다른 모두는 당당하고 멋지고 세련되고 자신감 넘쳐 보였어요. 콧대 높던 나는 높았던 높이만큼 낮아져 바닥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면서, 병든 홀아버지를 모시면서 사실 나를 잊을 만큼 나는 낮아져야 했어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내가 잘못한 적도 없는데 아이의 실수에 죄송합니다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었고, 병든 홀아버지를 집에 모시는 그날부터 나는 남편과 시댁에 180도 낮은 자세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당당하던 나는 그 어디에도 없었어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무작정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써야겠다.'라고 생각한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글쓰기는 글쓰기라기보다 자기 위로하기가 더 맞았던 것 같아요. 나를 위로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몽롱쓰기, 모닝페이지로 잘 알려진, 의식의 흐름대로 무작정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가장 좋았던 점은 글을 쓰면서 나의 '딱한 내면아이'와 대화를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대화라고 해서 주거니 받거니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글을 쓰면서 나의 내면아이에 던진 질문이나 위로가 시공간을 달리해서 나에게 답을 했어요. 그랬구나! 내가 그랬구나! 그때 그렇게 외로웠구나! 나의 휘갈긴 글이 내면아이를 거쳐 다시 나에게 돌아오기까지, 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한 달이 걸릴 수도 있고 일 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결국 나의 내면아이는 나의 깊은 대화를 들어줍니다. 답하지 않아도 그거면 충분하기도 하고요.


꼭 글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글쓰기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도구 같아요. 나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의식의 흐름을 타는 것은 역시 글쓰기입니다. 몽롱쓰기나 모닝페이지 너무 좋지요. 나를 사랑하는데 너무 좋은 방법입니다.


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는 타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 사랑'의 끝은 타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나는 나를 깊이 사랑하면서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가족과 지인들, 만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었어요. 격려할 줄 알고, 희망을 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만나고 싶고 만날만 하고 만나도 도움 되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서 점점 그렇게 변해 갑니다. 두 아이도 좀 더 엄마 곁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남편도 자꾸만 멀어졌는데 어느새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습니다. 교실에서 늘 짜증 가득 우울한 표정의 선생님이 밝고 희망을 전하는 멋진 선생님으로 변화했어요.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며 혼자 웃습니다.


머무르지 말고 성장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성장입니다. 직장맘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홀아버지를 모시면서 나는 성장을 멈추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남편의 그늘에 안주하고, 결혼이라는 울타리에 안주했고 운명에 굴복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내면을 가꾸고 보살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특히 아버지 병환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나는 운명의 감옥에 붙잡힌 죄수처럼 스스로를 묶고 바보같이 성장하지 못했어요. 유일한 탈출구는 성장이었는데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기여하는 것이 '나 사랑하기'의 종착역

 성장했다면 기여해야 합니다. 저는 그랬습니다. 기여하는 즐거움이 컸어요. 내가 받은 사랑만큼 돌려주고 싶었고, 성장한 만큼 나누고 싶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도 모르죠. 그래도 기여의 즐거움은 성장의 즐거움을 훌쩍 뛰어넘는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기여하기는 나를 퍼뜨리는 것! 나의 존재이유를 더 멀리 전파하는 것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심 괜찮은 사람이 되려는 거죠. 그래도 나쁜 욕심은 아니니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온라인 활동은 비대면이기도 하고, 때로는 멋쟁이 프로도로, 엄지척 제이지로 익명이지만 신기하게도 이기적인 사람과 기여하는 사람을 잘 구별해 냅니다. 기똥찹니다. 결국 이기적인 사람은 누구도 좋아요를 눌러주지 않고 기여하는 사람은 늘 좋아요와 최고를 받아요. 어떻게 알고 그러는지 너무 신기할 정도죠. AI나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알려주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점점 더 기여하는 삶에 마음이 기웁니다. 막말로 삼성가의 회장님이 돌아가실 때 두 주먹만큼이라도 쌓아놓은 보물을 가져갈 수만 있었다면 나는 더 가지는 삶을 선택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늘 퍼주고 빈손이던 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삼성가의 회장님도 똑같이 빈손으로 실오라기 하나 챙기지 못하고 하늘나라고 가시더라고요.

그렇다면 더 많이 가지는 삶보다 더 많이 기여하고,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퍼뜨리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죽기 전 나누지 못해 아쉬운 많은 가진 것을 떠올리기보다는, 이미 나눈 많은 것을 떠올리며 행복하게 죽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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