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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의 약속

#12. 다시 돌아올게

by 천윤준호


"다시 돌아올게."

지키지 못할 그 오만의 약속을 제멋대로 했다.


나도 겨울잠을 자는 건지 괜히 달아나고 싶은 감정이 빼곡하게 채워진 날들이 있었다. 멍하게 방치 했던 나의 청춘. 벚꽃이 지듯이 지나치게 녹아버린 사월의 밤. 그리고 이후에 헐레벌떡 찾아온 소박한 오월의 아침. 옹졸하고 비겁해진 삶에 만만한 희망만을 붙들어 맸다. 바빠진 현실에 마음을 파먹는 듯한 고통이 주둔했다. 이럴 때면 다시 돌아온다는 터무니없는 낡은 독백을 했던 날이 생각났다. 지쳐버린 열정의 지속성을 수반하게 하는 건, 오로지 사랑해야 한다고 단정 해버린 요원한 내 마음이었다.


해변가에 가면 버려진 나무 막대기와 철썩 치는 파도로 만든 모래성이 그렇게 좋았다. 정확하게는 모래성을 만드는 것이 좋았다. 어깨가 타지 말라고 보자기를 망토처럼 묶어 주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났다. 해변에 가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늘진 돗자리에 앉아 멀찍이 우리를 보았다. 그리고 손을 흔들면 그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손을 흔들었다.


모래로 작은 손을 덮어 토닥거리며 놀았던 두꺼비집 놀이도 떠오른다. 주변 자갈로 만들었던 작은 댐도 기억난다. 형과 함께 만든 모래성은 그다지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만족스러웠다. 쉽게 무너지는 그모래성을 연신 어루만지며 무너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 해변을 떠날 때가 되면 항상 나는 그들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도 안되는 약속을 저지르고 말았다. 우리는 또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어린 내가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만날 수있다는 그 알량한 희망을 믿었던 것인지, 나는 그 분리의 시간이 두려워 약속을 했다. 오만한 약속을 했다.


그렇게 바다에서 놀고 나면 항상 온 몸 어딘가에는 생채기가 났다.

한창 놀 때에는 순간에 주어진 행복을 즐기느라 몸에 상처가 나는 줄도 몰랐다. 그렇게 염분이 강한 바다에서 놀고 나면 상처가 쓰라려 왔다. 언제 상처가 난 건지 어쩌다가 상처가 생긴 건지 잘 모르겠다.

아마 부서져 날카로운 조개에 베였거나, 모난 조약돌 혹은 누군가 버린 쓰레기에 상처가 났을 수도 있다. 아려 오는 생채기에 다시 바다로 들어가기 무서워졌다. 다시금 쓰라려 아려 올까, 바다에서 놀았던 그 행복도 두려워했다. 시간이 지나고 도리어 본 그 때의 나는 우리가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쯤 알고 있었다.


그저 그 작은 희망을 믿었던 거였다.


지나간 건 아픔을 남겼다.

세월은 흘러 우리를 낡게 만들었다. 외적인 모습이나 그 안에 들어있는 영혼이나 모두를 부식 시켰다. 훼손되지 않는 것들은 그 고유가치가 뛰어나게 평가를 받아왔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젠가 작은 파도에도 무너지는 모래성은 훼손되기 쉬운 친구였지만

나는 그 존재 자체를 사랑했다.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했던 오만의 약속처럼 그 희망 자체로 내게는 사랑할 이유가 있었다. 어느 순간이 되면 그 상처들이 기억에 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바다로 들어갔다.

어쩌면 알고 있어도 들어갔던 거다. 그 행복은 생채기로 막을 수 없었다.


오늘도 오만의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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