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기 전 남산을 오르고 직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우연히 지난날 기록하기 위해 찍은 수십 장의 남산 사진을 들여다봤다.신기하게도 힘이 더 드는 날이나 마음이 복잡한 날에는하루에 두 번 남산을 오르거나 이른 새벽에 오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힘들수록 늘 남산으로 향하고 있었고, 남산을 오르며 마음을 다잡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유불문 남산등반
남산에 오르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 이유를 막론하고 오른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남산을 오르기 시작한 초반에는 잘 지켜지지 못했고, 음주를 한 다음날이거나 야근 혹은 마음이 무거운 날에는 더욱이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도 무작정 시작하고 묵묵히 오르니 이젠 남산을 올라야 마음이 편한 경지에 올랐다. 심지어 힘들수록 더 나 자신을 몰아붙인다. 새벽에 비틀거리며 남산을 오르거나 수도 없이 쉬어가며 오르는 웃픈 추억도 생겼다. 이젠 남산을 가지 못하는 핑계를 만들기보단 내일 남산을 오르기 위해 준비물을 챙긴다.
유일한 취미,오버페이스로 인한 번아웃
20대부터 미친 듯이 일만 하다 보니 나는 취미가 딱히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유일한 위로와 휴식은 금요일 저녁에 맞이하는 혼술과 OTT시청이 아니었을까 싶다. 간단한 안주와 함께 기울이는 술 한잔은 일주일 근무를 마치는나만의 의식이 되었다. 바삐 지나온 20대에는 주말에도 근무를 하거나 대학교 수업을 들었으니 유일한 휴일인 금요일 저녁만큼은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잠깐의 쉼은 젊은 나를 재충전하기 충분했다.
이직을 하고 대학원 진학까지 하며 자연스레 술 한잔의 여유도 없어졌다. 성공하고 싶었고 최연소 임원을 꿈꾸며 미친 듯이 일하고 공부하며 꿈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로 안되면 되게 한다는 열정과 함께 열심히 달리는 과정은 기대되었으나 내 페이스를 넘어 무리하기 시작했다. 과열이 되고 균열이 가며무리하는 만큼 서서히 무너지는 건 알고도 악으로 버텼다. 약한 건 나약이고, 아픈 건 죄악이라고 독하게 밀어붙이던 30대 초반, 이제 커리어의 전문성을 다져야 할 때, 나는 하얀 깃발을 들고 항복을 선언했다.과열은 파열로 이어지고 뜨거웠던 나의 열정이 무색할 만큼 건강도 경력도 한순간에 무너트렸다. 다시 한번 나는 인생에서 넘어졌다.
짚고 일어나는 용기
인생에서 넘어진 순간에는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위로와 응원은 받을 수 있지만, 정작 일어나기 위해선 본인 스스로 두 손을 짚고 내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
넘어지고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운동이다.힘들수록 의존하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 운동하며 나 자신을 밀어붙여 나아가보았다.술을 마셨다면 다음날 새벽에 비틀거리더라도 남산을 오르고 마음이 답답할 때는 아침, 저녁으로 남산을 올랐다. 일반적인 상태가 아니기에 몇 배로 숨이 차오르고 힘이 들지만 정상을 찍고 잠시 앉아 쉴 때면 남산은 어김없이 멋진 풍경을 선물하며 나를 위로한다.
내일 또 다른 하루가 온다
큰 깨달음은 없다. 그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뭐가 됐던 어제는 지나갔고 오늘은 왔다고 새삼스럽게 알려주는 듯했다. 어제처럼 다시 괴로움의 연속일 수도 있지만, 도전을 할 수도 있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 현재(present)는 세상이 주는 선물(present)이기도 한 건가. 오늘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고 내일도 또 다른 새로운 하루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내 상황이 심각해 보이지 않고 덤덤하게 대처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많은 문제들은 자연스레 해결되어 간다.
어둠도 불을 켜면 밝아진다
때론 퇴근 후 남산을 오르다면 서울의 밤야경을 잠시나마 돌아본다.도시의 등대 같은 수많은 사무실과밤바다에서 발광하던 플랑크톤 같은 차량들의 불빛을 보다가 문득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다른 사람도분명 버거울 수 있는 일들이 있을 테고 그걸 다 버티고 잘 이겨내고 있겠지란 막연한 생각을 하니 오히려 위안이 된다.그렇게 내 마음속에 불을 켜니 조금씩 어둠이 밝아진다.
모두에게 힘들 때 찾는 자신 만의 남산이 있다. 정말 남산을 오르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나만의 특별한 무언가 일 수 있다.힘들 때 힘을 낼 수 있는 루틴을 만들어야 극복이 되고 한 단계 성장하는 기회를 맞이한다. 그와 더불어 반복적인 움직임 속에서 남산이 경치를 선물하는 것처럼 잠시나마 위로의 순간도 찾아온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잊고 새로운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30대 중반에 맞이한 남산 오르기는 힘들 때일수록 버팀목이 되어주는 나만의 빛나는 루틴이 되었다.
나는 힘들수록 남산을 오른다. 그렇게 오른 남산이 풍경과 함께 위로하며 난 다시 극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