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지 않다면 남산을 오를 때는 전화나 문자, 카톡 등 수신되는 메시지를 잘 확인하지 않으려 한다. 정말 바쁘게 흘러가는 우리 사회 속에서 잠시나마 나만의 휴식 공간을 가지고 싶어 나는 도심 가운데 있는 남산에 때론 숨는다. 정말 빠르게 흘러가던 시간이 남산을 오를 때만큼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흘러가며 나만의 공간 속에 숨어 쉬어간다.
나만의 공간 찾기
지금의 30대가 있기까지 지난 20대에는 더욱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각종 경조사와 대학원 강의, 그리고 주말 근무까지. 돌이켜 보면 여유가 없어 나만의 공간을 찾지 못했다. 더 나아가, 잠시나마 나만의 공간 없이 집안 공용공간에서 지내면서 꼭 집 안에서 내 공간을 찾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어쩌면 내 공간이 많지 않다 보니 소유에 대한 욕심을 덜어낼 수 있었고, 법정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를 조금이나마 몸소 깨우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내 집 또는 내 방만이 나만의 공간이 될 필요는 없다. 나만의 공간과 장소가 때론 공용으로 이용하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시간이 나면 나만의 공간을 찾아 여정을 떠나기도 했다. 남산을 만나기 전까지는 주로 망원 한강공원이나 내가 타고 다녔던 중고 경차가 나만의 안식처였다. 나만의 공간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그저 앉아있을 때면 평안이 슬며시 찾아온다. 지금 그 공간으로 남산을 정했다. 사계절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자연을 느낄 수 있고, 힘들게 정상을 오르면 자연과 도시가 어우러진 최고의 경치를 만끽할 수 있는 보상을 받는다. 사람들이 붐비는 주말에는 살아있음을 느끼고, 인적이 드문 새벽에는 고요함과 함께 마음이 경건해지며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에는 오늘 하루가 정리된다. 그렇게 남산은 나의 공간으로 자리 잡아간다.
잠시 쉬어가며 재충전하기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때에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1998년 모 텔레콤 광고 영상
문득 1998년 모 텔레콤 광고 문구처럼 남산을 오를 때만큼은 잠시 세상과의 소통을 접어두고 나만의 공간에서 잠시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성공을 향해, 발전하기 위해 남들이 한 걸음 간다면, 난 두세 걸음을 가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는 잠시라는 단어는 사치였다. 수시로 전화가 울리고 메일이 오고, 경조사를 챙기기 위해 지방을 향하던 나도 어느덧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를 얻는 외향적인 성향이 강해도 과하면 오히려 에너지 소모가 크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느낀다.
인생이란 레이스에서 과속을 하던 나는과열을 이기지 못하고 폭발했고 중도 포기을 선언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앞으로 달리지 못한다는 답답함으로 매일이 괴로웠다. 참 신기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요동치던 내 감정이 잠잠해졌다. 오히려 다시 달릴 수 있게 재충전이 된 듯, 새로운 레이스에서 달리게 되었다. 그 이후, 난 일과 내 삶을 분리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잠시라도 앉아서 쉬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나니 쉽게 넘어지지 않았다. 급하지 않다면 남산을 오를 때만큼은 잠시 연락을 접고 나만의 쉼에 들어간다. 멋진 호텔이나 휴양지에서 쉬는 것은 아니지만, 남산으로 천천히 오르며 정상에 있는 벤치에 앉아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여유가 생겼다. 다른 사람들보단 아직도 시간적 여유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소하게 가족들과 외식을 즐기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도 하며, 나 혼자 만의 시간에 잠기기도 한다. 그렇게 인생에서 잘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깨달음을 얻는다.
쉬어가는 연습
어렸기 때문에 크게 내 공간이나 재충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열정이 가득했고, 확고한 꿈과 목표가 있었기에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 제대로 넘어져 보니 단단한 철도 지속되는 진동에 부러진다는 것을 몸소 깨우쳤다. 인생은 장기전이다. 그 장기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그 공간에서 잠시나마나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지치지 않고 다시금 내 페이스로 뛸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