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리는 거리에 비가 옵니다.
"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라고 시작되는 최헌의 '가을비 우산 속에'가 생각나는 시간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등진 그의 모습처럼 어둠은 문득 거리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위에 내리는 비는 쓸쓸함을 더해줍니다. 하나둘 상점들에 불이 들어오니 젖은 아스팔트들은 빛을 토해내 거리를 반질 거리게 칠하고 있습니다. 쓸쓸함과 윤슬 같은 반짝임이 공존하는 이 시간에 허기가 찾아왔고 오늘은 부침개에 막걸리 생각이나 이전에 가본 경험이 있는 식당을 찾아갔습니다.
음식점 앞 도로 틈에 만세를 하듯 손을 치켜들고 내리는 비를 모두 맞고 있는 풀이 있습니다. 왕바랭이입니다. 내리는 비는 왕바랭이에게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하긴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었겠습니까. 왕바랭이가 쳐든 팔은 오돌토돌한 톱니처럼 생겼는데 종자를 달고 있는 열매가 팔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왕바랭이를 영어로는 Indian goosegrass라고 부릅니다. 인도인(Indian)이란 말은 왕바랭이의 출신지를 짐작케 합니다. 실제 왕바랭이의 원산지는 인도와 아프리카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위풀(goosegrass)은 왕바랭이의 열매가 마치 거위의 발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까마귀발풀(crowfootgrass)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왕바랭이의 열매가 새의 발처럼 벌어지기 때문에 생긴 이름들 같은데 이해하려면 상상력이 좀 필요합니다. 왕바랭이를 한자로는 우근초(牛筋草)라고 합니다. 소 힘줄처럼 질기고 강한 생명력을 가진 풀이라는 뜻인데 개인적으로는 이 이름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납작한 잎과 줄기는 자동차가 그 위로 지나가도 쉽게 죽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기에 왕바랭이는 단단하고 건조한 땅이라 해도 주저하지 않고 들어갑니다. 남들이 회피하는 세계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꾸려 나가는 것입니다.
야외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비는 휴식을 주는 달콤함입니다. 일을 하지 못해 발생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이야 어찌할 수 없는 아쉬움이지만 그럴 때도 있는 거라 위로합니다. 비에 젖은 왕바랭이는 우비를 입은 전선의 군인처럼 보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일본에서는 왕바랭이를 오히시바(おひしば, 雄日芝)라고 부르는가 봅니다. 왕바랭이와 비슷하게 생긴 바랭이는 왕바랭이와는 달리 부드러운 땅을 선호해 여성 같은 풀인 매히시바(めひしば, 雌日芝)라고 부릅니다. *1) 그렇다고 왕바랭이나 바랭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곳만 찾아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땅이 있으면 그곳에 뿌리내리고 때에 따라선 건조하고 단단한 곳에서도 자라납니다. 우리가 흔히 잡초라고 부르는 식물들은 터를 탓하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터전에 순응해 살아갈 뿐입니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친구가 생각납니다.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그도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막걸리를 찾을 것 같습니다. 비는 곧 멈추겠지만 두툼한 즐거움을 가지고 또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막걸리를 다시 찾을지 고즈넉한 노래 한 곡을 들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 나를 만족시킬 것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