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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램 donggram Oct 16. 2023

'저런 애랑 어울리지 마'에서 저런 애를 맡고 있어요

금고 앞에 선 날 

화니의 엄마는 유쾌했다. 그 호탕한 웃음소리 뒤에는 눈물도 많았다. 그녀는 술이 가진 그림자를 아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내가 유일하게 이해받을 수 있는 어른이기도 했다. 밤낮 구분 없이 드나드는 나에게 "왜 왔냐"고 물은 적이 없다. 되려 "집에 있기 힘든 날은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로 오라"며 손톱처럼 자라나는 내 부담감을 깎아 주곤 했었다. 아줌마는 우리 엄마와 친구였다. 내가 눈물 바람으로 찾아오는 날이면, 여기에 니 딸이 와 있다고 한 번을 일러주지 않았다. 이곳은 내 숨구멍이었다.


딱 한 번, 그 숨구멍이 막힌 적이 있다. 사정상 그 집에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하필 엄마와 전쟁을 치르던 날이었다. 타이밍 좋게 동창에게서 연락이 왔다. 초등학생 때부터 친했던 아이였다. 혹시 오늘 너희 집에서 잘 수 있냐고 물었고, 친구는 흔쾌히 허락했다. 다행히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함께 라면을 끓여 먹으며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두 번째 숨구멍이 생긴 듯했다.


다음 날 아침, 우물쭈물하던 친구가 말했다. "민정아.. 미안한데 다음번에는 못 재워주겠다." 참 눈치도 없지. 나는 그 말을 단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의아한 내 눈빛에 친구는 말을 이어갔다. "부모님이랑 싸웠다고 그렇게 집을 나오냐고.. 엄마가 다음부터는 니 우리 집에 데려오지 말래." 순간 뒤통수가 얼얼했다. 안면의 근육들이 갈 길을 잃었다. 입꼬리를 올리지도 미간을 찌푸리지도 못했다.


15살에 만나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꼬박 7년간 숨이 막힐 때마다 화니네를 찾았다. 고맙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니가 그런 상황이었대도 난 똑같이 해줬을 테니까. 아니? 원한다면 더한 것도 함께 했을 테니까.




어릴 때부터 난 가까운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부모를 잘못 만난 건 내 탓이 아니었기에. 금고 속에 처박아둔 채로 행여나 누가 열어볼까 마음 졸일 이유가 없었다. 친구의 말에 처음으로 금고 앞에 섰다. 아무래도 넣어둬야 하는 걸까.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거지. 두 번째 숨구멍이란 건 애초에 없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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